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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정사 천관 사주 13 오미정사 천관(天官) 사주 13 푸른 하늘빛을 향해 밤새워 꿈꾸었던 나운명은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는 않고무거운 짐만 지고 가라며 팽개치고 있다. 울진에서 서울로 상경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 효자동의 유명한 P 철학관에 평생 사주보려고 갔다.철학관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왔는지 철학관 한옥 입구부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철학관 입구에서 큰마음 먹고 5천으로 접수하고 기다리다가 순서가 되자 큰 방에서 마주 앉으며 평생 사주보려고 왔다고 했다.철학관 도사는 여러 가지 질문이 끝나자 나보고 서기관이 안 되어 궁금해서 왔느냐고 했다. 생각지 못한 도사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아직 말단 직원이라고 하자, P 도사는 너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나의 평생 사주는 하늘에서 귀인..
오미정사 남영동 초대 12 오미정사 남영동 초대 12 정치적 자유는 공정과 정의가 구현되어야 하며,개인의 자유는 법 앞에 합리적이고 평등하여야시민의 가치가 존중되어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된다. 제5공화국 끝자락 무렵, 사무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게 되자 여직원이 받아서 전화가 왔다며 건너 주었다.전화기를 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장 선생이 아니냐고 묻게 되자 나는 전화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되물었다.거침없이 그는 남영동 W 반장이라고 대답하자 머릿속에서 생각난 것은, 신문 지면에서 유명했던 부천 성고문 사건의 고문 기술자가 떠올랐다. 무슨 일로 전화했느냐고 하니 만나서 할 말이 있으니 남영동 전철역 옆의 호텔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했다.무슨 일인지 모르고 나갈 수 없다고 하자, 그는 화난 음성으로 그럼 사무실로 직접 모시려 간다..
오미정사 제3의 길은 없다. 11 오미정사 제3의 길은 없다. 11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을 위한 정치노동자와 농어민, 소외계층을 위한 정치법 앞에 기회의 균등, 정의를 위한 정치나는 희구(希求)한다. 제5공화국 헌법기관 중앙 국장실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정체 불명한 건장한 두 사람이 소택 형의 허리띠를 움켜잡고 건물 4층에서 계단 아래로 끌어내려 가고 있었다.이런 광경을 목격한 나는 정신없이 웃옷을 책상에 팽개치고 그들을 향해 때려죽인다고 소리치며 계단으로 내려갔다.직원들이 이런 상황을 보고 있게 되자 당황한 그들은 도망치듯이 소택 형을 납치할 것을, 포기하고, 일 층 현관에 그냥 두고 달아났다. 건물 1층까지 소리치며 내려오니, 나이 많은 수위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4층에 나의 자리로 돌아와서 너무나 억울하고..
오미정사 백양로 독수리는 날다.10 백양로 독수리는 날다.  벼랑 끝 절벽 동굴 속에 나온 독수리새 깃털과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백양로 돌탑 위에 비상할 듯이 앉아서권력에 침묵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다. 1985년 서울 Y대학교 대학원에 39살에 높은 경쟁률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하게 되었다.울진 농고를 나온 나는 언제나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 꿈과 야망에 자존감을 상하게 했다.고향에서 25살 면서기 하면서 국립 S 대학교 부설 2년제 통신대학교 행정학과 제1회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서 5년제 행정학과 제1회를 졸업하자마자 같은 해에 Y 대학교 대학원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지면서, 자신감이 생긴 나는 Y 대학교 자매결연 대학인 미국 대학교에 공부하려 가는 것이 소망이었다. 갑자기 울진 종친회에서 선조 ..
오미정사 장밋빛 꿈과 희망 9 장밋빛 꿈과 희망 9 소낙비에 강물 불어나듯이메마른 땅 위에 봄비 내리듯장밋빛 꿈과 희망이 있었다. 대관령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 넘는 서울행 직행버스를 울진에서 탔다.대관령 높은 산비탈은 붉은 단풍잎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저 멀리 푸른 동쪽 바다를 내려다보았다.미래의 푸른 하늘로 과거의 어두운 땅을 덮어 버리겠다는 장밋빛 꿈과 희망이 있었다. 울진 군청에 근무하면서, 33살에 총무처 공무원 시험을 쳐서 중앙부서인 헌법기관 총무과에 발령이 났다.국가에서 중앙부처 50개 기관에 태양열 7.5평의 독신자 아파트를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임대 및 분양을 받았다.독신자 7.5평 아파트에서 자취하며, 통학버스로 직장에 통근했으나, 불편하여 울진 군청 근무할 적에 건립한 공무원 조합주택 대지 40평 기와집을 팔았다..
탱자나무 가시 탱자나무 가시 소택 형은선거 때만 되면 돈 때문에여기저기 정신없이 다닌다. 누구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정치적 신념은 변치 않았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공고되자 소택 형은 야당으로 몇 번 출마해서 낙선했지만, 다시 출마 준비를 하고 있었다.서울서 부장판사를 하고 난 후, 변호사를 하는 4촌 형이 갑자기 고향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고 했다.소택 형은 33살부터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몇 번 야당으로 출마한 정치적 기반과 울진 장가의 씨족 기반을 바탕으로 4촌 형은 출마한 것이었다. 울진 장가는 울진 어느 성씨보다 많은 대성이지만 지금까지 국회의원 한 사람도 뽑지 못하고 다른 성씨의 권력과 돈 앞에 앞잡이만 했다.장가 문중뿐만 아니라 지역의 모든 사람은 형제간에 둘이 나오면, 다 떨어진다며 힘없고, 돈 없는..
오미정사 황소의 힘 7 오미정사 황소의 힘 7  막걸리 술잔에 새끼손가락 집어넣고몇 번을 휘휘 젓다가 들어서 올리면술 방울은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고 혀끝을 길게 뽑아서 술 방울 빨면서총각김치 입이 터지도록 한입 씹으며손바닥으로 입을 닦는 술맛이 최고다. 대포 집 삐거덕거리는 나무 의자 앉아대작하는 사람 없이 홀로 자작하여도목줄에 터져 나오는 트림 냄새 맡으면술맛 중에 최고 아니고 무엇이 있으리 제3공화국 황소의 힘으로 된 정치 면장은 아침부터 직원회의를 하고 난 후, 담당 마을 출장 보내면서, 나만 사무실에 남아 있으라고 했다.황소힘의 정치 면장은 선거철에 지하 도관으로 흘려서 나온 검은돈 받았는지, 나만 제외하고 비밀히 직원들 주면서, 모두 출장을 보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그 시절이 많이 흘려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가 나..
모래무지의 추억 모래무지의 추억  소낙비 쏟아지는 여름날에 물 언덕 위의 외로운 나는목이 터지도록 불려보아도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속으로 광장에 비둘기 떼가 앉듯이 가슴속에는 고독만이 쌓인다. 1970년 여름날 기갑부대에서 제대한 나는 고향마을 오미산 물 언덕집으로 돌아왔다.부모님 모두 없는 왕대밭 고향집에서 소택 형은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정치를 하겠다며, 30살에 창당 준비를 하고 있었다.부산에서 군대 생활을 마친 바로 위의 형은 제대하고 난 후, 자취하면서 농사 일을 하다가 논에서 쟁기가 부러지자 그냥 팽개치고 부산 합판공장에 취직한다고 고향을 떠났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형은 너무 잘생겨서 주위의 사람들이 영화배우를 했으면 좋겠다며 칭찬했으며, 성격도 인정이 많았다.물 언덕집에 제대하고 돌아온 나는 생각과 마음이 불안..
오미정사 전선을 지키는 밤 오미정사 전선을 지키는 밤 5  강돌로 높게 쌓아 올린 돌담 위의 가시철조망 사이로 개울을 건너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대남 방송 소리에전선을 지키는 초병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뜬다.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끝내고 시험 봐서 기갑학교를 졸업한 나는 동기 한 사람과 제2 기갑연대 소속 기갑 중대가 있는 철원에 배치되었다.기갑 중대에 배치된 나는 2.4 종 담당 병장의 조수가 되고 한 사람은 탱크 속의 무전기를 수리하는 통신병이 되었다.기갑 중대의 2.4 종 고 참의 조수가 된 나는 언제나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어려운 군대 생활이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축구선수가 되면 굶주림에서 벗어날 것 같은 생각에서 기갑대대 축구선수 선발하는 기회가 오자, 밥을 마음껏 먹겠다는 생각에서 선수를 지원했다.기갑부대 축..
오미정사 젊은 날의 슬픔 4 오미정사 젊은 날의 슬픔 4 왕피천 흐르는 물 언덕 초가집 앞으로 수백 년 묶은 아름드리 소나무밭이 있고, 흰 밀가루 뿌리듯이 하얀 모래밭이 있다.밤이면 중천에 뜬 상현 달빛은 한 아름되는 노송의 가지 끝에 매달려서 울면, 강물 건너 둑의 은행나무 밑에서 소녀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온다.실낱 같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소리에 그녀를 향한 나의 그리움은 목이 메이도록 울고만 싶다. 그 옛날이 그리워라.꿈에라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흘러간 세월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 그녀를 향한 마음 오래 간직하리라. 고등학교를 가정형편이 어려운 나는 울진 농고를 여학생이 없는 임업 과에 들어갔다.농고에 들어간 나는 공부보다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으며, 형이 군대에서 가져온 군화를 신으며 바리 재를 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