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정사 제3의 길은 없다. 11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을 위한 정치
노동자와 농어민, 소외계층을 위한 정치
법 앞에 기회의 균등, 정의를 위한 정치
나는 희구(希求)한다.
제5공화국 헌법기관 중앙 국장실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정체 불명한 건장한 두 사람이 소택 형의 허리띠를 움켜잡고 건물 4층에서 계단 아래로 끌어내려 가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나는 정신없이 웃옷을 책상에 팽개치고 그들을 향해 때려죽인다고 소리치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직원들이 이런 상황을 보고 있게 되자 당황한 그들은 도망치듯이 소택 형을 납치할 것을, 포기하고, 일 층 현관에 그냥 두고 달아났다.
건물 1층까지 소리치며 내려오니, 나이 많은 수위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4층에 나의 자리로 돌아와서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만 흘렸다.
다음 날 아침 직장에서 직위가 높은 상관이 모든 직원을 지하 식당에 집결시켜 놓고, 나 들으라고 하는 말로써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준다고 했다.
저녁 식당에서 만난 소택 형은 어제 사무실에서 있었던 용감한 나의 행동에 대하여 칭찬했다.
그때 소택 형은 K 씨가 대표인 사회주의 정당의 정책실장이었으나, 민주사회주의 정당을 새로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창당 설립확인서를 받으려고 갔다.
헌법기관 국장실에서는 이미 정보기관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소택 형을 납치해서 창당하지 못하게 방해할 목적이었다.
결국, 소택 형은 공무원인 나의 신분이 문제가 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민주사회주의 정당의 창당을 포기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의 직장을 가지고 협박했을 것이며, 말단공무원인 나의 모가지는 몇 번이고 잘렸다가 붙었다는 생각 했다..
정치적 지식이 부족한 나는 평생을 독신으로 정치적 삶을 살아온 소택 형에게 창당하겠다는 민주사회주의 정당의 역사에 관하여 물었다.
우선 사회주의(Socialism)란, 용어는 1820~1830년부터 쓰게 되었으며, 그 어원은 라틴어의 (Socius= 우애 동지 협동) 및 그 파생어(Societas=단체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회주의라는 말을 최초로 나타낸 자는 영국의 사회개혁자 Rober Owen(1771~1858)으로서, 1820년대의 그의 사상과 행동은 노동운동, 협동조합 운동하면서 사용했다.
서구사회의 사회주의 발생 기원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소련의 혁명 이후, 페이비어니즘(Fabianism)으로부터 사상적 실천적 원천이었다.
국제사회주의 운동에서 정식 일반화가 된 것은, 프랑크푸르트(Frankfurt)프랑크푸르트(Frankfurt) 선언과 오솔로 선언으로서 서구의 민주사회주의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사회주의의 사상은 최초 생성된 기원은 동학 사회의 개혁 사상, 신간회 운동, 조소앙의 삼균주의 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소택 형의 정치이념은 해방 후, 지금까지 정치 현상은 보수 일변도의 정치구조에서 경제적 사회모순과 병폐로 계층 간의, 지역간의 불신과 갈등으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제3의 길인, 민주사회주의 정당만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 정의를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정치적 신념은 변함없었다.
그 후, 민주사회주의 정당을 창당하지 못했으나, K 대학교 교수로서, 사회주의 정당 간사장인 K는 구속되어 감옥에서 자살했었다.
그의 후임으로 소택 형이 간사장 직무대행을 하다가 야당 정치의 거물인 DJ가 정치를 포기선언 하면서, 외국으로 갔으나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소택 형이 존경했던 DJ가 새로운 정당을 창당함으로써, 그 정당에 합류하겠다며, 기존 사회주의 정당을 해산했다.
이때 나는 소택 형을 보고 영남이 보수 텃밭이므로 거물 정치인 YS 쪽으로 정치적 방향을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몇 번이나 권했다.
소택 형의 외로운 정치적 투쟁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적과 동지를 만들어 내면서, 살아왔던 제3길의 길은 영원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