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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정사 장밋빛 꿈과 희망 9

꿈과 희망

장밋빛 꿈과 희망 9

 

소낙비에 강물 불어나듯이

메마른 땅 위에 봄비 내리듯

장밋빛 꿈과 희망이 있었다.

 

대관령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 넘는 서울행 직행버스를 울진에서 탔다.

대관령 높은 산비탈은 붉은 단풍잎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저 멀리 푸른 동쪽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미래의 푸른 하늘로 과거의 어두운 땅을 덮어 버리겠다는 장밋빛 꿈과 희망이 있었다.

 

울진 군청에 근무하면서, 33살에 총무처 공무원 시험을 쳐서 중앙부서인 헌법기관 총무과에 발령이 났다.

국가에서 중앙부처 50개 기관에 태양열 7.5평의 독신자 아파트를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임대 및 분양을 받았다.

독신자 7.5평 아파트에서 자취하며, 통학버스로 직장에 통근했으나, 불편하여 울진 군청 근무할 적에 건립한 공무원 조합주택 대지 40평 기와집을 팔았다.

 

서울의 7.5편 아파트는 소택 형을 주고 경기도 부천시 심곡동 단독 1층과 2층으로 된 주택을 2층만 분양 매입하여 신혼집으로 준비했다.

서울에서 소택 형을 만나면, 고향에는 얼마나 외로운지 결혼을 독촉하면서도 서울 여자는 소 빽 따긴지 개 빽 따긴지 모르니 고향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다.

 

어느날 생각지도 않았던 고향에서 면서기 할 때 같이 근무했던 여직원이 강남 고속 터미널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자신의 바로 밑의 여동생과 같이 왔으니 속히 나오라고 독촉을 하자 당황한 나는 울진 군청 양정계 근무할 때의 생각이 났다.

 

그때는 오토바이를 타고 농협에 근무하는 그녀를 보기 위해 출장을 빙자해서 자주 농협에 갔으며 그녀를 너무 좋아했던 생각을 했다.

들뜬 마음에 7살 아래 말띠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 붉은 바탕의 말이 달리는 넥타이 매고 가서 음식점에서 돈가스를 사주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강이 흐르는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 백악관이라는 예식장에서 처형이 소개해 준 그때 내가 좋아했던 농협 여직원과 나는 37살에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은 부천시 심곡동에 있는 단독 2층에서 신혼 생활하면서, 종로 4가에 있는 헌법기관의 총무과에 근무했다.

 

2층 단독 집에서의 결혼 생활은 큰 방에는 장롱도 없이 이불을 방 귀퉁이에 몰아두고, 천계 천에서 퇴근길에서 산 14인치 흑백 T,V만 있었다.

텅 빈 방에 손님이 오면 이불이 보기 싫은 것 같아서 중고 가구상에서 조그만 사제 장롱을 샀으나, 아침 배달할 적에 비가 올 까봐, 밤잠을 설치게 했다.

 

하루는 갑자기 고향에서 장인이 올라와서 2인용 플라스틱 밥상에 저녁을 차렸는데, 장인은 탁하게 생각했는지 밥상부터 하나 사라고 했다.

바둑을 좋아한 장인은 저녁에 둘이 함께 바둑을 두면서 나보고 집안에 기둥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알지를 못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로 밑의 처제가 집에 와서 직장을 부탁하여, 소택 형의 소개로 세무사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시집을 갔다.

얼마 후, 막내 처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시집을 가자마자 처남이 대학교를 서울서 졸업하면서, 직장 여직원과 결혼하여 따로 살았다.

그 후, 제일 위 처형의 아들이 집에서 조금 있다가 직장을 잡아서 결혼을 한 후에 집을 나갔다.

 

이 모든 것이, 말단 공무인 나는 경제적 힘이 들어도 즐겁기만 했으며,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생각하게 되었다.

가끔 인천에 있는 바로 위의 형의 집에 가면, 형은 너는 처가 집에만 매달려 산사고 꾸중을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고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집의 식구들이 많아 토요일과 일요일 쉬는 날은 언제나 국수 아니면 라면을 먹어도 즐겁기만 했다.

 

한 달이 지나면 얄팍한 누른 봉투에 봉급을 넣어 주면, 아내는 작은 밥상에 소주 한 병을 마시며 미래에 대한 장밋빛 꿈과 희망 가졌다.

 

빛이 오기 전에 어둠이 먼저 오는가?

눈물의 빵을 먹으면서 꿈꾸는 세상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희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