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로 독수리는 날다.
벼랑 끝 절벽 동굴 속에 나온 독수리
새 깃털과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백양로 돌탑 위에 비상할 듯이 앉아서
권력에 침묵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다.
1985년 서울 Y대학교 대학원에 39살에 높은 경쟁률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하게 되었다.
울진 농고를 나온 나는 언제나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 꿈과 야망에 자존감을 상하게 했다.
고향에서 25살 면서기 하면서 국립 S 대학교 부설 2년제 통신대학교 행정학과 제1회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서 5년제 행정학과 제1회를 졸업하자마자 같은 해에 Y 대학교 대학원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지면서, 자신감이 생긴 나는 Y 대학교 자매결연 대학인 미국 대학교에 공부하려 가는 것이 소망이었다.
갑자기 울진 종친회에서 선조 비석을 세운다고 기부금 모집한다는 연락이 왔으나, 한 번도 소택 형이 국회의원 출마 해도 야당 정치한다는 구실로 다른 성씨의 앞잡이만 했던 종친회였다.
결혼 초기에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었으나, 이때 한 번 감정과 생각을 통제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내 몰래 은행 대출을 받아서 기부금을 냈다.
울진 종친회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내가 많은 돈을 기부하자, 종친회 회관을 건립한다고 연락이 와서 2번이나 돈을 기부했다.
종친회에서는 당시 육군 소장 출신으로서 서울 종친회 회장이며 이름 있는 소주 주식회사 회장보다 더 많은 돈을 기부했기 때문에 놀랐다.
제5공화국 정치체제 하에서 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Y 대학원의 연우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으며, 대학 교내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5공화국 정치권력에 대한 대학생들은 침묵하지 않고 매일 Y 대학교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가기 위해 백양로에서 데모했다.
대학교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 특공대와 학생들의 밀고 당기는 데모대는 매일 계속되었다.
학생들이 밀리면서 교실뿐만 아니라 교내 전체가 가스로 가득 찼으며, 나는 화장실로 도망가서 수돗물로 얼굴에 흘린 눈물을 닦아 내었다.
전국적으로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한 데모대가 확산이 되면서, 학생들과 일반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데모대의 행렬은 강물이 불어나듯이 거리를 꽉 차게 집결되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불만은 종로 5가 거리로 몰리면서, 동대문 방향으로 군중들은 홍수처럼 불어났다.
데모대 군중 속으로 사복 경찰들이 섞이면서, 구름처럼 몰리는 데모대와 구분할 수 없게 되다가 한계점에 도달하면,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이 일제히 덤벼들어 닭장차에 가두었다.
사복 경찰에게 잡히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직장이 있는 종로 4가4 방향으로 뛰다가 다방에 무조건 뛰어 들어갔다.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다방 마담은 문을 잠그며, 전등불을 끄고 다방 사방에 촛불을 켜면서, 촛불이 가스를 없앤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방 밖에는 계속 적으로 뛰어다니는 군화 소리가 가슴을 울리며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정치적 상황은 소용돌이 장처럼 혼란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미국으로 망명 갔다가 한국에 돌아온 J 씨에게 나는 시국 강연을 초청했다.
미국에서 오자마자 일류 대학원생들이 강의를 초청하자 케이 승낙하여 남산에 있는 이름 있는 식당에서 초청 강의를 했다.
남산 초청 장소에서 사회를 보며 진행하는 데,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내가 초청하지 않은 알 수 없는 많은 사람이 모여 물 반 고기 반이었다.
그의 강의 내용은 자신이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강의가 끝나고 나서 학들은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놀았다.
이튿날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대학원생들이 초청 강연을 하게 되자 기분이 좋았는지 대전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갔다.
대학교 학생들은 그를 보고, 유신의 잔당은 물려 가라고 ““ 계란을 던졌다.
그는 ”유신의 잔당이 아니라 본당이라고 했다,“ 는 신문 기사가 났다고 했다.
정치 변동기의 그는 밥상을 차려 놓았는데, 먹지 못한 정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