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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술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

1. 생애

이중섭은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양 종로 공립학교를 다녔다.

그가 그림에 대한 재능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나타났으며, 정주 고읍의 오산학교로 진학하면서, 미국에서 유학한 미술교사 임용림의 영향으로 예술관이 형성되었다.

이중섭의 흰 소

그는 제국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으로 옮기면서 중학시절부터 문화학원의 진취적인 의식이 가미하게 되었다.

그의 미술체계는 처음에는 피카소와 고갱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구려 벽화의 고대 북방 계통의 본질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문화학원을 졸업하면서, 1938년부터 자유 전을 제2회부터 7회까지 출품하였으며, 전쟁 중에 일본의 재벌의 딸인 마나코와 현해탄을 건너는 사랑을 하게 되었다.

1950년 6, 25가 터지자 그는 월남하였으나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수용공간이 부족으로 피난민들과 같이 거리의 거지신세가 되었다.

그 후, 제주도 서귀포에서 농가의 별채에 살면서 아내는 보리 이삭을 줍고 자신은 바닷가에서 게를 잡으며, 이웃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활을 하였다.

그는 각박한 피난시절에도 예술가로서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었다.

그는 1954년 서울에 와서 피난 갔던 사람들이 모이면서, 명동에 부산 광복동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를 좋아 했으며, 시인과 소설가를 좋아하며, 문학인들과 자연스럽게 친화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착수한 것은 신촌의 이종사촌 집에 있으면서, 일본으로 보낸 아내의 만남에 대한 꿈을 예술로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1955년 그는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 흰 소, 길 떠난 가족, 닭, 제주에서, 새벽, 가족과 호박 등을 전시하였다.

전시에서 상당한 작품이 많이 매매되었으나, 그는 작품을 판매한 돈으로 아내가 있는 일본행 꿈을 꾸었으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값, 밥값으로 다 날리고 절망감에 정신적이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입원하면서도 연심, 모색, 사색 등 무의식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그는 1955년 노염이 식어가는 9월 6일 정오에 청량리 적십자 병원에 조용히 눈을 감았던 것이다.

2. 회화의 주제

이중섭 황소 얼굴

<소>

이중섭이 가장 많이 다룬 소재가 소였으나, 그는 온전한 유채 안료를 사용한 것보다 대부분 에나멜과 같은 도료를 섞어서 종이, 마분지, 베니어판, 장판지, 은박지 등에 사용하였다.

그의 소의 소재는 자화상이거나 어머니로 은유되는 대지의 상징적 존재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의 소의 소재 화된 작품은 흰 소, 황소, 싸우는 소, 소와 아이, 소와 새와 게, 길 떠난 가족의 소 등이 있으며,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그의 강인한 외모와 수집은 내성은 소의 면모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소의 작품에 대하여 격렬한 모습을 보여주는 황소를 “쏟아지는 듯한” 황소로 표현하거나, 흰 소에 대해서는 작가의 분신으로서, 작가의 고뇌에 찬 영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의 흰 소는 동경시절부터 시작했으며, 이는 단순한 대상의 소재가 아니라 특정한 개인의 상징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소의 모습은 힘차게 발을 내딛고 일하는 모습이나 격정이 휩싸인 싸우는 소의 모습과 달리 소의 두상만 그린 황소의 모습은 슬픈 운명을 지닌 동물의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감정이입에 의한 그의 자의식의 한 표명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친구와 술

그의 예술의 특성은 강한 주제의식과 그 연장선상에서 민족적 기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은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의 예술의 진취적이고 분망한 대에 기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소, 닭, 가족은 풍부한 색채 사용 없이 극히 제한된 색채로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또한 자연 풍경화에서도 색채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굵은 필선으로 나뭇가지를 앙상하게 드러내는 강인한 표현으로 형태에 대한 의지를 선명하게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