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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술

박수근의 생애와 예술

박수근의 생애와 예술

1. 생애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정림리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7살에 양구 공립 보통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하였으나, 부친의 광산업 실패로 상급학교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진학을 하지 못하였다.

나무와 여인 앞에서의 아내와 딸

그는 보통학교에서 미술에 관심이 많아 성적이 다른 과목보다 좋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대한 꿈은 있었으나, 미술가가 되겠다는 결심의 동기는 밀레의 “만종”의 복사판 작품을 대하면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는 것을 하느님한테 기도를 하였다.

그는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였지만, 1932년 18세 때에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되자, 어린 나이에 당시 미술가들의 유일한 등용의 관문에 입소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화제가 되었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춘천에 홀로 가서 고생을 하다가,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에서 “일하는 여인”이 입선이 되었으며, 그 후, 몇 번 입선이 되었으며, 결혼을 하고 나서 춘천 도청의 과장의 도움으로 평안 도청에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평남 도청 서기 직을 사직하고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6. 25동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하하여 서울 창신동 큰 처남댁에 기거하다가 뒤늦게 아내와 자식들을 상봉하여 같이 살게 되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그는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자리에서 생활을 하다가, 1953년에 국전에 출품한 작품 “집(우물가”)이 특선이 되고 “노상”이 입선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작품에만 전념을 하면서, 1956년부터 반도호텔 내에 작은 화랑을 열어 미군과 외국인 상대로 기념 품격인 그림을 그려서 팔았다.

그림으로 생을 영위하기 위하여 국전이나 대한미협전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1955년 국전에서 “오후”가 입선, 대한 미협전에서 “두 여인” “노상” “산” 가운데 “두 여인”이 국회 문공위원장 상을 수상하였으며, 1956년 국전에 “나무”가 입선, 대한 미협전에 “노점”과 “풍경”을 출품하였다.

나무와 여인

1959년 국전당국으로부터 추천작가로 통보받았으며, 1962년에 처음으로 국전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국전심사위원으로 심사를 하고 난 후에는 실망을 토로하면서, 심사위원이 되더라도 다시 심사를 안 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국전에 출품작품이나 추천작가로서 대전에서 대표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하면서, 현실에 대한 불만과 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1965년 5월 6일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생전에 화실조차 없이 마루가 화실이었으며, 생전에 개인전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값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작고한 후에 오늘날 1980년대 이후, 미술가운데 가장 높은 작품 값을 받는 작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2. 작품의 주제

그의 작품은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았으나, 예술가로서의 생전의 평가보다 사후에 진정한 평가와 관심의 대상이 된 작가가 되었다.

그는 지방을 전전하며, 독학으로 미술의 길을 걸어온 생전의 무명작가였지만, 예술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불꽃같은 정념으로 작품에 진실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의 수평으로 이동하는 구도로 이루어져있으며, 나목과 인물을 배치시키고 있지만, 나목만 클로즈업하거나, 나무와 인물에 있어서, 길을 가는 사람이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무를 등지거나 나무 옆에 서있는 모습이었다.

기름장수

그의 작품은 근경에서 원경으로 깊어지면서 전개되는 구조를 띠고 있으며, 나목이 있는 풍경으로 일정한 양식적 과정의 작품으로서는, “나무와 여인”과 “고목과 여인“시리즈가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그의 예술이 갖고 있는 특성은, 소재와 기법에서 주로 다루었던 범주는 인물, 풍경, 정물 위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은 19세기 인상파 이후의 미술사적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당시의 미술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의 인습에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의 모티프 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독학으로 미술수업을 함으로써, 정식 미술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 인습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작품은 누드 그림이 없다는 것은 그의 미에 대한 관점은 아름다운 여체보다 일하는 여성상에서 더욱 아름다움을 찾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