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사상
서언
원효는 617년 경북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시대상은 고구려와 수나라 간에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 상태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협공하여 신라를 위협하던 시기이었다.
원효는 삼국통일을 목전에 둔 시기에 신라가 국교로 공인(527년) 된지 100년이 지난 시기였다.
원효의 본래 이름은 설서당이며, 골품제를 따르던 신라시대의 계급은 귀족에 해당하는 6두품 출신이었으나, 성골이나 진골과 같은 왕족과는 신분의 격차가 있었다.
원효가 불교에 입문했을 때는 18살로 자신의 집을 초개사라고 명하고 자신의 이름을 이른 새벽의 뜻을 지닌 “원효”라고 바꾸었다.
원효는 29살에 황룡사에 들어가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으며, 특별한 스승도 없이 불교경전을 통해 스스로 불법을 터득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불교 공부를 하고자 두 차례 시도한 것은, 첫 번째 34살 650년 고구려를 거쳐 당나라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 부근에서 고구려 경비병에게 붙잡혀 첩자로 몰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두 번째는 11년이 지난 661년 45살에 당주(당진)에서 당나라로 가는 도중 오늘날 천안 부근에서 폭우를 만나 오래된 무덤에서 노숙하다가 무너진 무덤에서 밤에 목이 말라 해골바가지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아침에 보니 썩은 해골 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게 된 원효는 역겨워했으나 같은 물을 마신 것인데, 다른 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새기게 되었다.
결국, 원효는 생각과 마음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게 되었다.
당나라 유학 행이 좌절된 후, 무열왕 김춘추의 딸 요석공주와 사이에 아들을 낳은 것이, 이두를 체계화한 설총이었다.
원효는 승려의 신분임에도 얽매이는 삶을 싫어하고 민중들과 어울려 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했었다.
원효는 686년 3월 산중의 혈사(굴속의 절)에서 사망했으나, 자신만의 불교 재해석과 이에 기초한 방대한 저술을 남긴 책은 100여 종 240 여권에 달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등이다.
2 원효의 철학사상
원효의 사상은 기원전 6세기경에 불교의 석가모니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가르침이 불교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불교는 모든 삼라만상은 인과 연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하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강조했다.
불교는 초기에 수행자 개인의 정신세계를 중시하여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 소승불교로부터 출발했고, 이후 중생과 함께하며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대승불교가 갈라져 나와 독자적인 불교 교리를 형성해 나갔다.
한국의 불교는 4세기경 삼국시대에 전래가 되었으며, 인간과 자비의 사상이 있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배려하는 가치관을 내세웠다.
원효는 기존의 불교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불교사상을 설파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겨서 중국, 일본, 인도까지 전파되었었다.
원효의 사상은 일심 사상과 화쟁 사상으로 집약되면서, 일심 사상은 하나의 마음이라는 데서 서로 통합한다는 의미로 ”중생들은 모두 하나의 근본에서 출발했는데 모두들 근원을 버리고 흩어지려 한다며, 바깥으로 흩어지는 것들을 모아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귀명이며, 귀명의 대상은 일심이며, 일심은 삼보라는 것이라고 했다.
일심이란, 세 가지 보물을 뜻하는 삼보로서 불, 법, 승이라 했으며, 불은 부처이고, 법은 부처의 가르침, 승은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 집단이라고 했다.
원효는 일심을 바다에 비유하여 ‘바다에는 네 가지 뜻이 있어, 매우 깊음과 광대함과 다하지 않은 온갖 보배와 온갖 형상이 비치어 나타난다.“ 라고 했다.
중생이 영원히 생사의 바다에 빠진 채 열반의 언덕에 나아가지 못한 것은, 의혹과 사짐 때문이며, 의혹은 법을 의심하는 것과 법에 이르는 교문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의혹은 수행에 방해가 되는 두 개의 문을 통해 의혹을 떨쳐서 수행해야 하는데, 두 개의 문은 진여문과 생멸문이라고 했다.
진여문은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고 증감과 차별이 없는 절대적 본체이며, 생멸문은 발생과 소멸이 있고 증감과 차별이 있어, 진여문은 본질적 측면이고 생명문은 현상적 측면이므로 이 둘은 둘이면서 하나라고 했다.
그러므로 진여문에서는 지행을 닦고, 생명문에서는 관행을 닦아서 지행과 관행의 수행을 함으로써, 만행을 갖출 수 있다고 했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 ”열반경“, ”반야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깨우쳤다.
원효는 이러한 깨우침을 바탕으로 불교의 가르침 전체를 한 가지 이치로 종합하여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불교사상 체계를 세웠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마음을 맞추어 간다는 뜻으로 조화롭게 어울림을 말하며, 불교의 법치는 모두 이치가 있고, 이치가 있으니 모두 허락되고 서로 통합한다고 보았다.
원효의 불교 설법방식은 무애 사상으로서, 장애가 없다는 뜻으로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
다.
무애인은 자유인으로서, 진리의 길이 속세의 길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불교에 이르는 장애와 문턱으 모두 무너뜨려야 하며, 귀족이나 민중이나 모두 평등하게 불교를 법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럼으로써,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