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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오경석의 개화사상

오경석의 개화사상(開化思想)

1. 개념

오경석

개화사상은 조선왕조 말기 1853~1860년부터 형성되어 발전한 자주 근대화와 변혁을 위한 진보적인 사상이다.

개화라는 용어는 본래 주역에서 모든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를 궁구(窮究), 경영하여 일신하고, 새로운 것으로 백성을 변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조선왕조 말기의 개화사상에서 19세기 중엽의 민족적 위기에서 나라와 백성을 자주적으로 근대화하고 변혁해서 진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 개화사상의 형성

 

개화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중국으로부터 구입한 신서 등의 도움으로 오경석, 박규수, 유홍기 등 (1853~1860)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최초의 선구자는 중인 출신의 역관인 오경석이었다.

그는 북학파 박제가의 실학을 공부하고, 김정희와 이상적의 금석학과 서화를 수학한 후, 23세에 1853년 중국에 파견된 조선사신단의 역관으로 북경에 체류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귀국에 앞서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고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중국 인사들이 지은 새로운 책으로서 신서를 구입했다.

 

그는 1853년 이후, 13차례 북경에서 해국도지, 영환 지략, 박물 신편, 질의문답, 중서 견문록 등 신서를 수백 권을 구입하였다.

그는 안으로 박제가의 실학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밖으로 신서를 연구하며, 1853~1859년 기간에 한국의 개화사상을 형성시켰다.

더욱이 1860년 영 . 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 사건에 충격을 받은 후, 나라를 구하기 위한 연구를 거듭하여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1866년 제너널셔만호 사건과 병인양요의 충격으로 조선의 위기를 판단한 오경석과 유홍기는 혁신정치의 주체세력을 형성시키었다.

서울 북촌의 양반거주지역의 양반 자제들을 선발하여 개화사상을 교육시키고 발전시켜 정치세력으로서의 개화당을 형성하여 혁신정치가 나라를 구하기로 하였다.

 

3. 오경석의 개화사상

 

조선 왕국의 사회와 민족은 닥쳐올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민족적 대위기에 직면하여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대위기 속에서 조선왕조의 정치는 부패해 있고, 조선의 사회와 경제는 낙후되어 타게 해 나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민족적 대위기를 타개하려면, 국정전반에 일대 혁신을 일으켜야 하며, 일대 혁신은 반드시 자주독립적으로 단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에 의뢰해서는 안 되고 나라의 혁신을 일으키기 위한 새로운 혁신적 정치세력을 형성하여야만 한다.

조선은 세계 대세에 보조를 같이 하는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서양과 같이 철과 석탄 등을 이용하는 공장과 산업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만 한다.

 

조선은 서양의 선진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양반신분제도를 폐지하며 능력 있는 인재를 관직에 채용하여야 한다.

조선은 군함을 구비하고 국방을 근대적으로 튼튼히 하여 자기 힘으로 방위하고, 종래의 쇄국 정책을 탈피하여 자주적 개국을 단행하며 세계 각국과 통상하고 서양의 선진 물품을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조선은 세계 각국과의 통상으로 손실을 입지 않는 균형무역으로 조선의 금, 은과 외국의 물품과 교역하여 수입을 많도록 하여 국가 경제가 빈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개화사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지배적 사상이었던 위정척사 사상과는 판이한 사상이었으나, 1860년대의 생활에서는 너무나 획기적인 새로운 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