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정치적 사상
한국의 경제는 1970년 이전에는 북한보다 앞섰다고 할 수 없었으나, 이후부터는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하였다고 불 수 있다.
박정희의 정치사상은, 1970년 8월 15일 광복 제25주년 경축사 행사에서 3만여 군중을 향해 “평화통일의 기반 조성을 위한 구상을 밝힌다.”라고 하면서, 남북한 긴장상태 완화 없이 평화적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북한이 먼저 남한이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인도적 견지에서 통일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 간의 가로가 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그에 대한 경력으로 한국의 일부 장성과 주한미군은 의심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 측에서는 황상 그의 정치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었다.
1963년 9월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가 시작되자, 민주당 정권 시절의 윤보선 대통령은 그의 사상 경력을 들추어 논쟁의 대상으로 하였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당시에 그는 “미친개는 몸 둥이 약이다.”라며, 군사보복 방안을 극비에 세워 정면대응을 할러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있었으나, 미국의 강력한 저지로 실행을 옮기지 못했지만, 그는 대통령으로 재임 시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언제나 미국 측으로부터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게 되자 “좌익 콤플렉스”에 시달려도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었으며, 그의 정치사상에 의구심을 갖게 한 연유는 광복군이냐, 친일장교이냐 이였다.
그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북 문경 보통학교교사로 3년간을 재직하다가 1940년 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1942년 3월 23인 만주국 수도 신정(장춘)교외 남강 대에서 만주 군관 하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만주국 황제 푸이 하사품인 금시계를 받았었다.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일본 제국시대 친일행적과 해방직후의 좌익 연류에 대한 시비이었으며, 그가 친일 행적의 문제가 된다는 것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의 6년 동안이었으며, 이 시절에 과연 독립군 토벌에 참여한 친일파인가 아니면 비밀 광복군이 가였다.
사실은 그는 1942년 수석 졸업하여 특권으로 일본 육사 57기에 편입하여 2년을 마친 후, 1944년 7월 1일 소위로 임관하여 1년 만에 중위로 진급하였으며, 한 달 뒤에 만주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는 만주 군인 시대의 정보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실지로 “신태양” 악극단에 위장한 비밀 광복과 접촉한 광복군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것이 진실인 것 같았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의 정치사상은 배고 품을 알고 가난을 추방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늘 상 경제제일주의이었으며, 경제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어 나라를 새롭게 만들 수 없다는 의미에서 혁명 지휘부를 “국가재건 최고회의”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의 정치사상은 “조국의 근대화”로서, 재임 18년간을 근대화를 통한 민족중흥을 이룩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천명을 받아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이룩한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은 겨울철에 땔감 없이 추위에 떨어야 하는 초가집을 비유하여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한 꿈과 희망을 가졌다.
그의 정치사상은 이승만 대통령을 애국자로 생각은 하지만, 미국식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을 하지 않아 국민들을 가난 속에 허덕인다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건국 이후, 최초로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재건과 근대화라는 슬로건 아래 박차를 가해 나갔었다.
그는 10년 안에 국민 총생산(GNP)을 두 배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워 1960년 1인당 GNP 94달러에서 1970년 248달러로 2.6배로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5.16 직후부터 수출에 관심을 두어 산업 중심의 공업구조에 중심을 두었으며, 생산 경험, 자본, 기술이 활용하기 위하여 공업센터부터 건설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수출 제일주의를 내걸고 오직 수출만이 국가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출용 원자재 구입 달러를 위해 28시간 동안 걸쳐서 서독으로 나갔었다.
그는 국빈방문의 초라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약소국의 설움을 절감하면서까지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과의 눈물의 상봉 끝에, 서독에 대한 광부와 간호사를 보낸 대가로 차관 4, 000만 달러를 받은 눈물의 역사를 남겼으며, 그의 경제적 성장발전은 오직 수출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업들에게 자금부족을 호소하였다.
1972년 “수출상품은 국력 총화의 예술품”라는 휘호를 쓰기까지 하면서, 해마다 숙명처럼 겪어온 보릿고개를 1970년부터 통일벼 재배의 성공으로 가난을 넘길 수 있었다.
통일벼는 밥맛이 없고 농촌 지붕 이엉을 엮는데 나쁘다고 하자, 쌀의 생산량이 많아 보리 고개를 넘길 수 있었고, 농촌 지붕개량을 새로 하면 된다며 강력히 추진하였다.
경제성장으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와 공업화로 인한 인구가 대도시 집중화 현상이 일어나자 수도권 일대에 투기현상이 일어나자 그린벨트 지정고시를 하여 환경보전을 위한 최고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성장에 따른 고속도로, 공업화, 새마을 운동 등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농촌의 땔감과 낙엽 채취로 인하여 산야가 황폐화되자 큰비가 올 때마다 홍수가 나서 농촌의 피해가 극심해 지자, 그는 산불방지와 산림녹화사업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의 새마을 운동은 1970년 초에 농촌마를 20% 안팎의 전기 공급에서 급속한 확대로 호롱불에 벗어나게 했으며, 초가지붕의 스레드 지붕으로 개량하고 농로의 확장 도로와 다리 교량 건설 등 새마을 운동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을 인식한 그는 고속도로 건설로 서울과 부산 등 건설하여 경제개발의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제발전에 두드러진 성공은 철강기술 협력과 이자부담이 없는 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한 것이 경제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
이처럼 국가경제발전을 이룬 그는 혜성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나서 밝은 빛을 비추다가 어느 날 한방의 총성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박정희의 정치적 사상이나 남긴 업적에 대하여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