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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함석헌의 정치사상

함석헌의 정치사상

목차

1. 생애

2. 정치사상

1. 생애

함석헌 사상가는 1901년 3월 13일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출생하였다.

함석헌 사상가는 1917년 평양고보 2학년 17살에 황덕순과 결혼을 하였으며, 다음 해에 3학년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가한 후, 학업을 중단하고 소학교 교사를 하였다.

그는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동경고등사범학교동경 고등사범학교 문과에 입학을 하였으며, 1928년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 등을 가르치었다.

그는 1933년 “성서조선” 독자 회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강의하였으며, 1940년 평양 송산 고등 농사 학원을 인수하였으나,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 대동 경찰서에 1년간 구치되었다.

함석헌과 부인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했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을 하였다.

1945년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되어 50일간 구금되었으며, 1946년 오산학교 반정부 전단 살포 사건의 배후 인물 협의로 피검되어 1개월 옥고를 치렀다. l

1947년 월남하여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집회를 시작하였으며, 1950년 6.25 때에 부산 수영에 피난하여 성서 집회를 계속했으며, 1953년 서울로 귀환하여 “대 선언”을 발표하였다.

1955년 중앙신학교에서 강연을 하다가 다음 해에 “사상계”에 글을 쓰면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가”를 집필하였고, 그 후 사상계에 발표와 시국강연회를 하였다.

1965년 “뜻으로 본 한국사”를 4판 출판하였으며, 1967년에 장준화 선생의 옥중출마를 지원하기 위해 신민당에 입당을 하였다.

민권 투쟁

1969년 범청년민주투쟁위원회와 침묵시위를 하였으며, 공화당의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의 창간호를 발간했으나, 인가가 취소되자 법정투쟁을 하였으며, 1973년 씨알농장을 정리하여 구화 고등 공민학교를 인수하였으며, 1973년 시국선언 발표와 삭발 단식을 하였다.

그 후, 긴급조치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으며, 1974년 윤보선, 김대중과 할게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동참하여 시국선언을 하였다.

1975년 동아일보 사태에 대한 재야 22인의 호소문 발표를 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으며, 그 후, 전태일 5주기 추모예배를 주최했으며, 3.1 명동사건으로 정보부에 연행되자, “시알의 소리” 의 사무실과 가택수색을 당하였다.

 

1977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받았으며, 1978년 간디 서거 30주기 추모 강연회, 민주 선언문 발표, 가택연금과 “민주주의 국민연합” 발족을 하였으며, 장준화 3주기 추도예배를 YWCA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1979년 김대중과 함께 기자회견, 3.1절 성명 발표를 하였으며, 1980년 보통 군법회의에서 1년 선고를 받았으며, 씨알 소리 10주년 기념회 강연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여 계엄 당국으로부터 씨알 소리는 일방적으로 폐간을 당하였다.

1985년 두 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며, 일본에서 “한국의 민중운동과 나의 걸어온 길”의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1988년 “함석헌 전집” 20권을 완간하였으나, 1989년 2월 4일 88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함석헌 사상가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한 미국 건국포장”을 받았다.

2. 정치사상

함석헌 선생님은 한국의 역사 사상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격동과 격변 시대에 살아오면서, 일제 강정기의 독립운동, 동족상쟁의 분단시대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그는 민족정신으로 3.1 운동에 앞장섰으며, 민족 투쟁의 중심에서 역작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출간 등 많은 저서활동과 사상계 등 필화사건을 겪었다.

그는 저항하는 사상가로서, 한일협정의 반대나 “씨알의 소리” 등으로 반 유신 투쟁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의 저항정신의 본바탕은 독재정권에 혼자만의 저항이 아니므로 대중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여야 새로운 역사의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다운 저항이라고 하였다.

그의 저항정신은 독재로 인한 겨울이 온다면, 봄은 멀지 않았다는 새봄의 상징되는 해방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

시국강연

그의 저항정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비폭력 사상으로서, 폭력으로 무장한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의 구조 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이는 간디의 불살생 비폭력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지극히 비사교적인 인물로서, 비정치적이며, 권력과의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해방 후에 본의와는 상관없이 감투를 썼었다.

그는 몇 번이고 감옥에 투옥되어 지독한 고문과 추위에 굶주리며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고통을 받았으나 자신의 정치사상은 변함이 없었다.

부정선거 인한 자유당 정권 하에서는 그의 필화사건은 “선거를 하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고팔고 억지로 하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뿐이요,....”언론에 발표되자 바로 구속되어 경찰에 온갖 만행을 겪었으나 그의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필화 사건 이후에 “사상계” “새벽” “사조‘ 등에서 많은 글을 썼으며, 마치 씨알이 꿈틀거림을 내다보는 예언서와 같은 글을 썼었다.

그의 시집인 “수평선 너머” 시학의 “선전”에서 그는 “주권자들을 향해서 선전 하노라, 네 힘이 강하고, 법이 엄하고, 조직이 치밀하고, 군사가 흉악해도, 자신은 너의 시민이 아니므로 너를 향해 싸움을 편다고 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하며, 국민의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며, 주권자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저항하는 정치사상가로서, 비폭력 정 항운 동의 철학사상을 가진 것은, 단순히 인간의 체계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키는데서 역사적 저항이었다고 하였다.

투쟁의 길

그는 3선 개헌 저지 투쟁으로서 학생, 교수, 변호사, 문인, 종교인 등 사회 각계의 양심적인 인사들과 함께 통합하게 된 것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정치사상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국가 지상주의 체제에 저항하고, 유신 폭압에 맞서기 위하여 삭발 단식하면서, 전 국민들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궐기 투쟁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시알의 소리”를 통하여, 자신의 힘으로 자기 교육으로,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모든 손을 잡고, 어떤 종교, 종파도, 어떤 정치세력도 속하거나 관계없이, 어떤 권력 숭배도 반대하고, 스스로 역사의 주체를 믿고, 모든 악과 싸우는 사명으로 같이 살기운동을 펴 나가면서, 비폭력 사상과 행동의 원리를 삼는다는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