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정치적 사상
1. 생애
정도전은 1342년에 호 복판 관인 아버지 정운경과 영주 출신인 우연의 딸인 어머니의 3남 1녀 중에서 맏이로서 영주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삼봉(三峰), 자는 종지(宗之)이다.
그는 19세에 성균시서 합격하였으며, 부인 최 씨와 결혼을 하였으며,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 목의 사록에 임명되었으며, 23세에 개경에 돌아와 전교 주부 종 7품에 임명되었다.
24세에 왕의 비서직인 동례문지후 전임되었으며, 부모가 모두 돌아가자 고향 영주에서 3년간 여 모살 이를 했으며, 삼각산 옛집에서 학문을 정진하였다.
30세에 성균관 학관들의 천거로 성균박사(정7품)에 임명되어 성리학을 강론을 하였으며, 33세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친원파인 권신 이인임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34세에 성균사예, 예문응교(정4품), 지젝 등 제수받고 문한직을 수행하였으나, 북원 사신이 명을 협공하기 위해 입국할 때에 영접사로 임명되자, 그는 사신의 목을 베겠다고 저항하여, 이 일로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백동마을로 귀양을 갔다.
42세에 함경도 함주막을 찾아가 종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만나 혁명을 결의하였으며, 43세에 전의 부령으로 9년 만에 벼슬길에 다시 올라 서장관이 되어 성절 사인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 금릉에 가서 우완 승습의 승인과 시호를 요청하였다.
44세에 성균 좨주(3품) 지제교를 재수받았으며, 46세에 외직 요청으로 남양 부사로 나갔다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자 왕의 비서직인 밀직부사(3품)로 임명되었으며, 이성계의 천기로 성균관 대사성(3품)으로 올랐다.
48세에 예문관 제학이 되었으며, 그 후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되자 재정을 담당하는 삼사좌사로 승진되었다.
50세에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어 우군 총제사에 임명되어 병권을 장악하여 우왕의 숭불 행사를 맹렬히 비판하는 배불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과전법을 제정하여 구세력의 반발로 거세게 받자, 평양판윤으로 보냈으나, 조정의 혼란과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협의로 봉화로 유배되었으나 다시 나주로 이배 되었다.
51세에 귀양에서 풀러나 고향 영주로 돌아왔으나, 정몽주, 김진양 등의 탄핵 상소를 올려서 다시 체포되어 예천 옥에 갇혔으나, 이방원에게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되자 사태가 역전되어 충의 군에 봉해졌다.
그 후 문화시랑 찬성사로 개국 1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왕명으로 고려사 편찬을 시작하였다.
52세에 명나라에 계품사 및 사은사로 가서 돌아온 후에 오행진 축기 도와 강무도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문하시랑 찬성사로서 동북면 도안 무사에 임명되어 함길도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하였다.
53세에 판의 홍삼 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고, 제독의 행사를 지냈으며, 경제개혁에 관한 상소를 오렸으며, 그 후 심기리 3편과 역대 부병 시위 제제를 이었다.
이방원을 위해 송시를 썼으며, 한양의 도시 설계도를 만들어 천도를 하면서, 한양건설을 찬양하는 신도가를 지었으며, 병권과 정권에 불만을 품은 변 중량을 체포 구금을 하였다.
55세에 과거시험 고시관이 되어 경서를 논하는 과목을 처음 넣고, 한성부 52방의 명칭을 지었으며, 봉화백에 봉해졌으나 명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56세에 봉화백으로서 초립을 하사 받았으며, 판의 홍삼 군부사로 다시 병권을 잡았으며 군사물자를 관리하는 유비 고의 제조관이 되었다.
57세에 성균 관제 조로서 “불씨잡변” 19편을 저술하여 성리학 입석 의지를 천명하였으며, “진도”를 가지고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진도를 익히지 않은 왕자들을 문책하였으며, 상군 절제사나 상대 장군, 군관 등을 탄핵을 하였다.
결국, 조준이 요동 공격 중지를 왕의 윤허를 받자, 방원의 군사들에게 남은의 첩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과 같이 있다가 살해되었으며, 둘째 아들도 살해당하고, 넷째는 자결하였으며, 큰 아들 진은 석왕사에 왕을 따라갔다가 살아남아서 세종 때에 형조 판사를 하였다.
지금은 정도전의 무덤은 광주 사리(양재역) 부근에 있다고 전해지며, 정조 때에 정도전의 학문을 재평가한 “삼봉 집”을 간행하였다.
2. 정치적 사상
정도전의 정치적 사상정신은 국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사상으로서, 모든 문제를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은 국민을 사랑한다는 애민사상, 국민을 존중하는 중민 사상, 국민을 보호하는 보민 사상, 국민을 기르는 목민(양민) 사상, 국민을 편하게 하는 안민 사상이었다.
그의 정치적 사상은 국가보다 국민이 윗자리에 있으므로 국민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통치자의 하늘이므로 통치자는 국민을 극진히 존중하고 사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통치자는 모든 행동이나 시설, 명령, 법제 등은 국민을 존중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의 정치적 사상은 국민이 국가의 근본이므로 통치자에게 국민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을 요청할 수 있는 도덕적 규범이라는 것이다.
만약, 통치자나 민본, 애민의 도덕적 규범을 저버리고 위배되는 악의 정치를 할 경우에는 하늘의 천명을 받아 혁명이 일어나거나 오늘날의 민주적 절차에 의하여 선거로서 통치권을 소멸시키고 유덕한 통치자가 천명을 받아 새로운 통치로 탄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정치적 사상은 맹자의 혁명사상에 의거하여 조선 왕조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그의 정치사상 이론은 조선왕조의 건국 자체가 혁명사상에 입각하여 진행되었으며, 이성계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민심의 추대와 하늘과 사람들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응천순인(應天順人)이라 주장하였다.
그의 정치적 사상은 국가 통치권을 국민이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정치적 사상으로서, 민본과 위민정신에 입각하여 국민에 대한 애정으로 국가 통치 윤리와 통치수단으로 하는 인정(仁政) 또는 덕치 정치이었다.
정치 세는 기본적인 통치 규범으로서 윤리를 실천하고, 바르게 하며,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데 확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정치적 사상은 정치를 윤리의 실현 과정으로 보며, 국가 관념이나 통치 관념은 권력이나 주권 중심이 아니라 도덕과 문화중심이 되어야 하며, 국가나 통치권의 기능은 권력의 입장이 아니라 도덕의 입장에서 보아야 하며, 통치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도덕의 실천자요 교화의 선포자라 하였다.
그러므로 정치는 민심을 따라야 하는 인을 바탕으로 민본, 애민사상으로서, 정치로서, 인정이며 덕치라는 통치수단으로 구체화하여 국민의 물질생활의 안정이라는 보민을 합하여 정치 경제 윤리의 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
그의 정치적 사상은 국가의 관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농민과 선비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농 일치의 관념으로서 관리는 사관 일치로서, 선비는 도덕을 체득한 사람과 관리는 교화를 실천하는 사람이므로 도덕의 체득 없이 교화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참된 선비가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관리 선발에서 철저한 능력주의를 강조하여, 많은 현인을 배출하고 관리가 되는 문호는 너무나 좁았었다.
그의 정치적 사상에서 권력구조와 통치체제에 있어서는, 통치권은 국민을 우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 조건은, 귀족이나 호족의 지배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켜야 하며, 통치자의 관리 자체의 권력남용을 방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상징적인 구심점이 필요하며, 통치 권력의 지배자는 국가의 상징이며, 국민통합의 구심체라고 하였다.
그는 문무를 겸한 인물로서, 내정개혁과 약소국의 지위를 벗어나기 위한 강력한 정치사상과 자주정신으로 국방을 강화시키는데 전력을 가했다.
그는 잃어버린 한민족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훈련과 군제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군사제도 정비, 국가 재정확보를 위해서 국민 개병제 확립, 군사를 중앙군과 지방 군의 이원화, 군사의 사병혁파, 군량미 확보 등으로 심혈을 기울었으나 이방원의 역습으로 비명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