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의 사군자(四君子)에 관하여
1. 사군자의 의미
문인화가는 산수화, 화조화를 그렸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고귀하다는 생각으로 교양이 흐르는 그림을 그렸으며, 자신들의 체면을 중시하여 사군자를 잘 그렸다.
그러므로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속에서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난, 사철 푸르러 굽히지 않는 정개를 보여주는 대나무를 그렸다.
대나무 그림은 가장 먼저 서예를 하는 문인에게 쉬운 소재이며, 채색이 필요 없이 제일 먼저 시작했으며, 송나라부터 유행을 탄 대나무는 청나라까지 전통을 이어갔다.
다음은 난초는 문인들이 나라를 잃은 설움에 뿌리 없는 난초로 표현을 했으며, 매화는 이른 봄을 가장 일찍 꽃을 피워 맑은 향기에 문인들의 취향에 잘 맞았다.
국화는 사군자의 문인화 가운데 가장 늦게 서리 내린 가을날 국화의 드높은 기상을 살리는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사군자는 문인들의 화조화로서 동양화로서 산수화와 함께 잘 그렸던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문인들이 “매 란 국 죽” 이 네 가지 소재를 학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인 군자에 빗대어 사군자라고 했으며, 이런 사군자는 문인들의 화조 화인 것이다.
2, 사군자
1) 대나무
대나무는 문인들이 좋아해서 가장 먼저 그렸던 대나무로 허공에 뻗은 잎으로 내면의 인격을 나타내었다.
대나무 그림을 처음 그린 유래는 달 밝은 밤에 창호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린 것이 최초라고 했다.
대나무 그림은 예술의 영역으로서 대표적인 대나무 전체를 그리지 않고 왼쪽 위에서 허공을 뻗어 나온 가지 하나로 대상으로 하여 그렸다.
그림속의 대 마디와 잔가지, 여러 방향으로 삐죽 뻗은 댓잎이 화면에 생기를 더해 눈앞에 있는 착각까지 들게 했다.(11세기 중반 문동)
결국, 그림은 학식이나 문학적인 감성, 인격 등을 먼저 쌓은 뒤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나무 그림은 이정, 유덕장, 신위와 함께 대나무 그림 화풍을 제일 먼저 새운 사람들이다.
이정의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그림은 대나무 줄기의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직선이었던 마디 모양을 둥글게 처리를 하였다;.
2.) 난
난초는 대나무처럼 문인들의 그림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원나라와 명나라의 시대에 사대부들의 죽음을 당하면서, 자연에 숨어서 고고한 향기를 내뿜는 난을 자신들의 처지와 비교하여 연민, 자존감으로 난 그림으로 표현을 하였다.
송나라 말기의 조명견의 난 그림은 요즘 그림과 달리 난초의 모양을 그리는 것보다 힘찬 붓질로서 난의 잎사귀를 묘사하였다.
그의 그림에서 난 잎은 매우 가늘며 뻗어 나간 모양새를 표현했으며, 땅 가까이 꽃들은 난의 향기를 표현하는 추상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먼 그림이 엇다.
조명견의 난의 그림에서 묘사하려고 했던 것은. “6월의 날씨가 찌듯이 더워지면 그윽한 난의 향기가 얼음처럼 솟아 정신을 맑게 한다.”이었다.
동양화에서 난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은 정섭으로서, 그는 평생 대나무와 바위, 난 이 세 가지만 그렸으며, 남 그림은 그의 인생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의 난 그림의 법은 굵은 잎과 부수적인 작은 잎을 어울려 그림을 그렸다.
조선 후기의 난 그림으로 민영익과 흥선대원군인 이하응이 있으며, 이하응의 난 그림은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 시절에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고고함을 상징하는 그림을 숨어서 그렸다.
그는 김정희에게 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으며, 생활고에 시달릴 때마다 그림을 팔아서 생활을 했다.
3). 매화
매화는 봄날에 꽃을 피워 향기를 풍기는데, 문인들은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나무를 추운 겨울에 이기는 세 벗이란 뜻의 세한삼우라고 하였다.
문인들은 자신이 고난을 딛고 멀리 향기를 보내는 매화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며 매화 꽃을 사랑하였다.
원나라 시절 매화를 그림 문인화가인 왕면은 매화를 너무나 사랑했으며, 그의 그림은 매화나무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뻗다가 끝에서 살짝 처지는 그림의 구도와 여백의 글씨와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었다.
여백의 글씨의 내용은 “연못가 매화 나뭇가지 꽃피어 먹의 흔적을 남기고, 매화꽃은 사람들에게 좋은 빛깔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맑은 기운을 흐리게 하려 함 일세”
매화는 화가들이 나타내는 봄의 희망이라는 정서를 다른 감정으로 나타내었으며, 반면, 세상을 즐겁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화의 맑은 향기가 서러움을 뜻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조선 중기 어몽룡, 허목 같은 매화그림은 이름난 선비가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매화에 흠뻑 빠진 조희룡 화가가 있었다.
그의 글씨와 그림, 시에 재주가 있었으며, 글씨와 매화 그림이 뛰어나 헌종이 그에게 금강산을 그리라고 할 정도로 산수화로 뛰어났다.
4). 국화
사군자 가운데 가장 보기 드문 그림이 국화그림이 있지만, 국화는 매화와 반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서리를 견디며 꽃을 피우기 때문에 사랑을 받았다.
매화보다 그림이 드문 이유는 꽃 그리기뿐만 아니라 잎사귀까지 난도가 높아 국화 잎사귀 묘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실제 모습을 묘사하는데 재능이 있어야 그릴 수 있었다.
문인화가인 심주는 묘사력은 직업화가 못지않게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그렸으며 활짝 핀 국화부터 피기 직전의 꽃송이까지 사실적 묘사를 했다.
그는 연한 먹으로 잎을, 그 위에 진한 먹으로 잎줄기를 묘사하여 사실적 표현보다 더 뛰어나게 느끼도록 했다.
국화가 문인화 장르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은, 우창숴 빼 부터이며, 그는 누구보다 국화를 사랑했으며, 그림 소재를 국화뿐만 아니라 모란, 대나무, 난과 같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국화 그림은 붓으로 능숙하고 힘 있는 선이 유창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전체적으로 구도를 역동적으로 배치하고 있어 국화와 바위가 덩어리로 어울리게 하였다.
그는 “달리는 곳에서는 법도를 떠날 수 없고, 정밀한 곳에서는 기백을 돌봐야 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