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창극에 관하여!
1. 창극의 개념
창극의 개념은 창을 기본으로 하는 고유의 음악극이며, 넓은 의미로는 판소리와 분창, 사실 극화된 것을 함께 지칭한 것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창극과 판소리는 구별된다.
2. 창극의 특징
창극은 아름다운 음악과 연극뿐만 아니라 무용, 화려한 무대, 관현반주 등 여러 가지 종합예술 형태로 고루 갖춘 극음악 양식이다.
창극은 서양의 오페라처럼 음악, 연극, 무용, 의상, 예술 등이 혼용된 종합예술로서,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요소로 형성되었으며, 민족 최고의 종합예술로서 자연발생적인 소리가 기본을 이룬다.
창극의 본래 형태인 판소리는 설화와 같은 자연발생적인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창작성이 강하지 않고 민중 속에서 오랫동안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어 왔기에 더욱 민속적이며 음악적 수법이 판소리의 창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3. 창극의 역사 과정
창극은 판소리가 탄생시킨 것은, 20세기 초이지만, 19세기 말부터 판소리가 창극으로 발전되기 위한 내재적 요인과 외부적 충격이 있었다.
창극은 판소리에서 연극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과 청나라 사람들에 따라 들어온 창희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에 신재효는 창과 연극성과 일치 시키려고 했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김세종의 판소리에서 창과 연극을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놓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창극 발전에 절대적 구실을 한 김용환, 이동배 등은 판소리의 내재적, 외재적 계기를 통합하여 창극을 탄생시킨 공로자이었다.
1900년대 초에 개화기에 따라 연극의 경우 판소리 명창들에 의해 시대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모색한 것이 창극이었다.
1902년 최초의 황실 극장인 협률사에서 처음 시작한 대화창은 명칭 그대로 창을 대화 형식으로 주고받는 창극의 초기 형태이었다.
1908년 원각사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대화창이라는 창극으로서 일보 전진된 형식의 백포장의 배경 막에다가 조명으로 천장에 백전구가 전부였으며, 도구는 거의 없었다.
이때 남녀 역을 의상을 갖추고 남녀 명창이 사실적 연기를 하여 도구도 갖추고 무대장치도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공연작품은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등이었다.
원각사 중심의 창극 운동은 일제 강정 기를 앞두고 문을 닫게 되자 창극인들은 흩어지면서, 지역에 따라 창극단이 조직이 되었다.
그 후, 창극단들은 경술국치와 때를 같이 하여 들어온 일본 신파극에 밀려서 활동이 어려움을 겪었다.
1910년대에는 태산준령을 그린 화폭 배경의 무대장치가 등장하여 가옥도 세우고 도구도 갖추어 전국적으로 공연 무대를 넓혔다.
그러나 창극단의 활동이 부진하여 광무대를 근거로 활약했던 송만갑 협률 사는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1933년 호남 재벌 김종익의 재정 후원으로 창극인을 집결시켜 조선 성악 연구회를 탄생시켜 당대의 최고 명창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여란, 박녹주 등 40여 명의 단원을 구성하였다.
1935년 봄에 창립 공연으로 정정렬이 편극 한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으며, 그 후에 조선 성악연구회는 전속극단으로서 창극 파를 두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작품은 춘향전, 심청전, 홍보전, 별주부전 등이었다.
1942년 창극파가 화랑과 합쳐서 조선창극단이 되었으며, 이들의 공연작품은 전래한 판소리 다섯 마당 외에 장화홍련전 등 고전소설과 근대소설을 창극화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창극도 활기를 찾게 되어 함화진, 박헌봉 등이 국악원을 창립하여 창극 재건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으며, 국악원은 산하에 국극사, 국극협회, 장안사 등의 창극단을 두고 공연활동을 했다.
1948년 9월 여류 국악인들이 따로 여성 국악 동호회를 결성하여 창단공연으로 옥중화를 공연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여성극단이 속출하였다.
1960년대에는 급속도로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였으며, 창극인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예술적 소양이 없이 상업주의로만 흘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