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 이순신은 누구인가?
충무 이순신은 1545(인종 1)년에 서울 건천동(중구 인형동 부근)에서 문반의 가문인 고려 때의 중량장을 지낸 이돈수의 12대 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에는 어머니 변씨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사대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뛰어났으며, 정감과 용감성을 겸비하면서,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
그의 유년시절에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기풍이 있고 남에게 구속받지를 않았으며,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고 했다.”
그는 1576(선조9)년에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봉사로 관직에 나갔으며, 그 후, 동구 비보 권관, 발포 수군만호를 거쳐서, 1583년 건원 보권관, 훈련원 참군을 역임하여, 1586년에 사복 시주보가 되었다.
그는 호인의 침입을 막아 내지 못하여 조정에 문책을 당하였으나,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조정에서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였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이 되고,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있을 때에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로 승진을 한 후,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로 지내고, 47세에 전라도 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군으로부터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고 수영 앞바다에 군사력을 총집결시켰다.
그는 최초의 해전에서 왜선 26척과 왜병을 궤멸시키는 옥포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 중에 있는 왜선 13척을 불태워버렸다.
그는 전력을 보강하여 정비한 후에 수많은 해전에서 왜선을 격퇴시키고 맹렬한 공격으로 일본 수군장인 구루시마를 전사케 하였다.
그는 한산도 앞바다에의 해전 끝에 일본의 총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시켰으며, 일본의 장수 와타나 등을 전사케 하였다.
그는 부산포 해전에서도 일본의 외선 470여척이 정박 중에 있는 것을 돌진하여 명공을 가하여 100여 척을 격파시켰으며, 1593년에 부산과 웅천의 일본 수군과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소탕하여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명.일 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본 국으로 돌아간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으나,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를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영의정 유성룡을 조정의 당파로 인하여 몰아내려고 하던 시기에 선조는 실정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원균의 상소만 믿고 그를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시켰다고 옥에 가두고, 원균을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때 유성룡은 끝가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 밖에 없으며, 한산도를 잃는 날에는 호남지방을 지킬 수 없다고 간청을 하였다.
그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자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길은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수군의 이순신인데 원균을 보내면 안 된다고 반대하는 체계를 올렸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백성들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통곡을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구한 공로는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을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을 수도 있을까, 일찍 죽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한탄을 하였다.
원균이 해전에서 일본 왜군에 완전 패하자, 선조는 당황하여 대신들을 불러서 의논을 하자, 병조판서인 이항복은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시 통제사로 재임용되어 남해 일대를 파악하니, 남은 군사는 120명 병선(거북선)은 12척이 고작이었으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명량해전에서 거북선 12척으로 왜군의 적선 133척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고 큰 전과를 올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았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적선 500척을 발견하고 공격하여 인본 군에게 많은 사상자와 선 척을 파괴하였으나, 그는 적의 유탄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고 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일생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임진왜란 중에 가장 위대한 무장으로서 큰 공을 세워 나라를 구한 민족사에 독보적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