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장군은 누구인가?
권율은 1537(중종 32)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과 어머니 창녕 조 씨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장인은 이항복이다.
그는 1582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 원정자가 되었으며, 그는 전적 감찰 예조 좌랑 호조 정량 전라도 도사 정경 판관을 지내다가 의주목사로 발탁이 되었으나 이듬해 해직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이러나자 광주 목사에 제수되어 임지로 가서나 외병에 의하여 수도가 함락된 뒤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함께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중위장이 되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을 하였다.
그는 이광에게 외군과 바로 싸움을 하여 도내의 병사를 희생할 것이 아니라 임진강을 막아서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군의 틈을 살피면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주장인 이광은 무모한 공격을 취하여 대패하여 선봉장인 이시지 와 백광언 등의 장수들만 희생이 되고 광주로 퇴각을 하였다.
그는 남원에서 1천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전주로 침략을 하는 왜군의 정예부대를 맞아 군사들을 독려하여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시켰다.
그는 공로로 전라감사로 승진을 하였으며, 다시 도승을 수복하기 위하여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을 하다가 용인에서 패한 체찰사 정철의 전투에서 패한 경험을 밟지 않기 위하여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의 독성 산성에 들어가서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 후, 명나라 과 호응하여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 진지를 옮기는 물색하다가 행주산성을 택하였다.
그는 조경에게 명하여 2일간에 걸쳐 목책을 완성하고,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 남기고 행주산성으로 군사들을 옮기었으며, 각지에서 모여들어서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마명미만이었다.
일본군 총대장인 우키타는 3만 병력으로 7대를 나누어 행주산성을 맹렬한 총공격을 하여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일사불란한 통솔력으로 군과 의병으로 사력을 다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군대는 왜군이 버리고 간 기치와 갑주 도창 등의 많은 군수 물을 노획한 전투가 1593년 2월 12일의 행주대첩이었다.
그는 왜병의 재침략을 경계하여 행주산성에서 오래 견디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파주 산성으로 옮겨가서 도원수인 김명원과 같이 산성을 지키며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회담의 회담이 진행되면서, 휴전상태로 들어가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하였다.
그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하면서,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이 되었으나, 바로 한성부 판윤으로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하여 명나라 재독 마귀와 한께 울산에 대진하였으나 도어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를 하였다.
1599년 그는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사망을 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04년에 선무공신 1등에 영가 부원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1841년 행주에 기공사를 건립하여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