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의 침략과 영향
1. 몽고족
몽고족은 몽고고원의 중심으로 만주와 중국 북부 등의 지역에서 황색인종으로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13세기 초에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족은 여러 개의 부로 분산되어 요, 금의 지배를 받다가 몽 고부의 테무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유목민족을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시켰으며, 태무진은 칸으로 추대되어 칭기즈칸으로 추대 외어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대몽 고국을 세웠다.
그는 정복전쟁을 추진하여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등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2. 몽고의 침략
1218년(고종 5) 몽고군이 거란의 유민들을 추격하면서 고려에 들어오며 침략이 시작되었다.
1차 침략
1229년 오고타이(태종)가 칸에 올라 요동 방면의 동진 국 및 금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고려를 침략하였다.
몽고군이 의주를 거쳐 공격하면서, 개경을 포위하여 항복을 요구하자 끝까지 대항하였으나, 막지 못하여 고종은 몽고의 권 항사를 인견하고 왕족 희 안공 정을 살리타의 둔 소에 보내 화의를 추진하였다.
2차 침략
몽고는 도단을 다루가치로 삼아 개경에 파견하였으나, 오만한 행동과 과중한 공물 요구로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사게 하였다.
무신 집정을 하던 최우는 몽고군이 수전에 익숙하지 못함을 이용하여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항전 태세를 갖추면서, 각지에서 다루가치를 습격과 공격을 하였다.
1232년 살리타가 몽고군을 이끌고 와서 고려 정부에 개경 환도를 요구하면서, 경상도까지 남하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으나, 김유후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함으로써, 몽고군은 철수를 하도록 몽고 세력을 축출을 하였다.
3차 침략
1235년 몽고군은 보복적인 성격으로 당구가 침략하여 경상도, 전라도까지 전 국토를 유린하였다.
몽고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각지의 산성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항전을 하였으며, 이때에 몽고군의 격퇴를 위해 대장경을 조판을 하였다.
1238년에 고려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몽고에 보내 강화를 제의하고 철군을 요구하였다.
몽고는 고려 국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모두 철수를 하였다.
고려는 국왕이 직접 입조 하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고, 위험한 일이므로 고종의 모후 유 씨의 상중임을 빙자하여 왕족 신안공 전을 당의 동생이라 칭하고 대신 입조를 하였다.
몽고는 반 몽 행위에 대하여 관원들과 영녕공 준을 왕의 친아들이라 하여 귀족의 자제 10인과 함께 몽고에 파견을 하였다.
제4차 침략
1247년 고려의 국왕 친조와 출륙 환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몽고군 아무 간이 침략해 왔으나 몽고의 구유가 죽자, 칸 위 계승으로 분규가 되자 철수를 하였다.
제5차 침략
1251년(고종 38) 몽고의 망구가 즉위를 하자 궁 왕 친조와 출륙 환도를 재촉하였으나, 무신 집정 최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253년 몽고는 애 구로 하여금 침략을 하였다.
고려 정부는 충실도감을 두고 군사력을 강화시켜, 해도와 산성에서 항전을 하였으나, 몽고군은 전국 각지를 약탈을 자행하자 고종이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화를 나와서 승천부에서 애구의 사신을 맞이하였다.
제6차 침략
1254년 몽고는 최항을 비롯하여 고려 정부가 개경에 한도 할 것을 요구하면서, 쟈랄타이가 몽고군을 이끌고 침략을 하여 전 국토를 유린하였다.
이때 포로가 20만 명이 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각 지방의 별초군과 백성들이 항전을 하자 자랼타이는 일시적으로 철수하였다.
1256년 쟈랄타이는 다시 침략을 하자, 고려 수군의 활약과 몽고에 사신으로 파견된 김수강의 외교활동으로 몽고군이 철수를 하였다.
제7차 침략
1257년 몽고에 보내던 공물이 중단되자, 쟈랄타이는 다시 고려를 침략하여 약탈을 하자, 고려는 조건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이행을 하지 않게 되자 다시 몽고군이 침략을 하였다.
1258년(고종 45) 강화에서 무신 집정 최이가 유경, 김준 등에 살해당해 최 씨 정권이 붕괴되자 대몽 강화론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몽고와 화의 교섭이 진전되어 고종이 강화에서 나와 승천부에서 몽고의 사신을 맞이하면서, 이로서 28년간 계속되던 전쟁은 끝이 났다.
2. 고려의 영향
고려는 28년간 끈질긴 대몽항쟁에도 불구하고 이후,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자주성을 크게 침해된 사항을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원의 부마국으로 전략하여 관제나 의전 등이 격하되고, 만호부나 호치 등이 몽고식 관제가 들어와 군사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쌍성 총 관부와 동녕부가 설치되고, 삼별초가 진압된 뒤에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가 설치되어 몽고의 지배하에 편제되었다.
사회적으로는 80여 년을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고의 풍속, 몽고식의 의복과 변발이 유행하는 등 고려 풍속의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적으로는 30년간의 장기간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되고, 원의 공물 수탈과 일본 정벌로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문화적 손실은 몽고군의 침략에 의하여 부인사와 신라 문화인 황룡사의 구층탑 등이 소실되었다.
특히, 고려인들의 대몽항쟁은 28년 동안 대항한 주체는 각지의 농민, 천민들이었나,
당시 고려는 군사제도의 붕괴로 집권 무신들의 사병은 있었으나 싸움에는 투입시키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은 대몽 강화가 성립된 후, 삼별초가 봉기하자 관노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항 몽 의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