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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제1공화국 자유당에 관하여!

이승만

1공화국 자유당에 관하여!

 

1. 서언

 

1공화국 자유당이 집권 정당이 된 것은,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신당 조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시기에는 6 .25 동란으로 정당제도가 확립되지 못하고, 국회 내에 안전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치적 포석을 위한 결단이었다.

 

2. 자유당의 창당

 

이승만 대통령을 추종하던 공화 민정회는 5개 기관사회단체이던 대한 청년단, 국민회, 대한 노동조합총연맹, 농민 조합연맹, 대한 부인회의 대표들과 회동하여 신당 발기 준비 협의회를 구성했다.

여기서 원내 파는 적극 호응하였으나, 원외 중심으로 발기인 모임이 생기게 되자 원내의 공화 민정회 소속 의원 수와 동수의 원외 인사 95명을 추천하여 원내와 합동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원내 외가 당명 및 정책 문제로 대립하자, 19511130일 이승만 대통령이 양원제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공화 민정회의 보수 원내 파가 적극 반대하자 원내 외 합동 준비위원회가 와해 되었다.

같은 해 123일 원내는 원내대로 자유당이라는 당명으로 창당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여 1223일 국회의사당에서 자유당으로 창당대회를 열었다.

이와 별도로 원외 세력은 이범석 중심으로 원내에 대항하여 1217일 부산 동아극장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당수는 이승만, 부당수는 이범석을 추대하고, 당명을 자유당으로 정하고 강령, 당헌 등 채택했다.

 

결국, 자유당은 같은 이름의 두 정당이 한 지도자 아래 창당되었으며, 원내 파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을 거슬렸으나, 원외 파는 이승만 대통령의 애호를 받았었다.

운외 자유당의 기본 강령은 압제 시대의 잔재와 관료주의 배제, 상하 귀천의 계급타파,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체제 확립, 민족 협동적 사회건설을 기함이었다.

독점경제 패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물리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과 양심적인 기업 및 기술자권익 도모, 빈부 차이 원인과 습성 거부, 국민 생활의 안정을 기함이었다.

3. 정당의 활동

 

1952년 이승만의 계획된 개헌안을 둘러싼 여야 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여당인 자유당 원 내외 파의 갈등이 심화가 되었다.

원외 파의 내무부 장관 이범석은 개헌안 통과를 위하여 원내 자유당을 제압하고 주도권을 잡았다.

.부통령 직선 개헌안의 표결 일인 74일 경찰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납치와 연금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적 파란을 일으키면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539월 이승만 족청계의 숙청을 선언하고 당수 제를 폐기하고, 부당수이던 이범석을 평당원으로 격하시키고, 당체제를 총재제도로 바꾸면서, 19541월 이범석을 자유당에서 축출했었다.

 

자유당은 제5차 전당대회에서 당을 재건하기 위한 기구 개편을 단행하면서, 이승만 총재 밑에 이기붕 총무부장이 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1954520일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재적 203석 중 114면 당선되었으나,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15석 당선되자, 자유당은 무소속의원을 포섭하여 헌법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넘는 137석을 확보했다.

195411월 이승만은 3선 금지 조항으로부터 면제시키고, 국회의 국무원 불신임권을 삭제하는 내용으로 헌법 개정안을 사사오입의 개표 방법으로 통과시켰다.

이 개헌 파동으로 자유당은 국민의 지탄받았고, 야당 의원들은 헌법 수호 위를 결성하여 호헌 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주국민당을 해체하고 민주당을 탄생시켰다.

19565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니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사망으로 이승만은 3선 되었으나 부통령 후보 이기붕 후보는 민주당 장면 후보에게 패했다.

19585.2 총선에서 자유당은 126석을 차지하면서, 4대 국회의장 이기붕, 부의장 이재학, 한의석 등 선출했다.

19603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지휘 아래 부정선거를 함으로써, 4.19 국민 혁명이 일어났다.

 

4. 결론

 

자유당은 강령에서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의 권익을 위해서 창당된 정당임을 자부하였으나, 보수정당으로서 일관하면서, 정책정당으로서 역할은 볼 수 없다.

자유당은 권력의 아집에만 몰두한 독재 정당으로서, 국민에게 평가받았으며, 반공에 공헌하고 6.25 사변을 감내한 공과 외에는 부패한 정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