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金正喜)에 관하여!
1. 출생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1856년(철종 7) 조선 말기의 문신, 실학자, 서화가이며,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 호는 추사, 완당, 에당, 시암, 노과, 농장인, 천축고선생 등이다.
예산 출신으로서 조선조의 훈척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문에서 병조판서 노경과 기계 유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 앞으로 출계 했다.
2. 성장 과정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협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나, 순주의 특별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었다.
1836년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834년에 10년 전 윤상도에 연루가 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 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1851년 영의정 권돈인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났으나, 정계에 복귀를 못하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3. 학문 과정
북학파의 일인자 박제가의 제자가 외어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으로 기울어졌었다.
24살에 부친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서 체류하면서, 옹방강, 완원 같은 거유와 접하면서, 금석학, 사학, 문자학, 음운학, 천산학, 지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고 금석 자료의 수탐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로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 “예당 금석과안록”, “진흥이 비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면서,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며 조선 금석 학파를 성립시켰다.
그는 수많은 청대 학술의 거벽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음운학, 천산학, 지리학 등 학문을 했다.
그의 학문의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불교학이며, 용산 저택 경내에 화엄사라는 가족의 원찰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불경을 설립했다.
말년에는 수년간 과천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선 지식의 대접을 받으면서, 어려 방면의 학문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 당시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해동제일통유”라고 칭찬했으며, 그 자신도 자부심을 가진 민족문화의 거성적 존재이었다.
4. 예술 과정
예술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예술은 시, 서, 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 미의 구현으로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온 조선 고유의 국서와 국화 풍에 대하여 철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20살 전후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으며, 예술의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연경에 가서 명유들과 교류하며 배우면서 안목이 일신한 다음부터이었다.
그는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었다.
5. 추사 화풍
추사체는 그가 말년에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으며, 그는 타고난 천품에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 미의 표출로서,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었다.
그의 사상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하여 저술한 “시선제가 총론” 시론에서 엿볼 수 있다.
화풍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 서, 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였다.
그림은 서권기와 문자항을 주장하는 기법보다 심의를 중시하는 문인 화풍으로서,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으로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으로 심의를 노춯하는 문기 있는 그림을 그렸다.
특히, 난을 잘 쳤으며, 그의 서화관을 가슴속에 뜻이 있어야 하고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피어나야 한다는 이념 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그의 예술은 조희룡, 허유, 이하은 등의 영향이 미쳤으며, 당시 화가로서의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의 예원을 풍미했다.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 “세한도”와 “모질도, 부작란‘ 등이 유명하며, 그의 문학에서도 시 아닌 편지 형식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갖는 문집이 있다.
추사 김정희만큼 역사상에 예명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구내의 여러 학자들이 학문, 예술의 각 분야별로 연구가 이루어져 왔었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한 선각자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