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확대에 관하여!
프랑스의 혁명은 다른 나라의 혁명운동이나 독립운동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사상적인 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계몽사상시대의 가치관을 높이 평가하고 이 가치관이 궁극적으로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신념이었다.
자유주의 이념은 공화제 정부형태, 대의제 입법기관, 성문헌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자유, 보통선거, 여성의 권리 등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대분할 수 있으며, 정치적 자유주의는 로크와 계몽 사상가들의 저술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고,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선봉 하면서 자유야말로 인간사회가 진보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경제적 자유주의 핵심은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배제하고자 한 것이며, 국가는 생산과 교역을 통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의 자유와 평등은 계몽사상의 이념이었으나 그 적용범위와 대상에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 혁명은 정치적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반면에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사회계급의 타파와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후 실현된 프랑스의 정치제도와 사회구조에서도 자유와 평등은 일부 시민에게만 한정되었으며, 여성은 보통선거에서 제외되었으며 사회의 일부계층에게는 평등한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다.
아메리카 혁명 후 제정된 헌법에서 노예제도와 관계되어 대서양 노예무역이 절정기를 맞아 노예를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부터 노예무역 금지와 노예제 폐지운동이 일어났으며, 1833년 영국의회는 2천만 파운드를 노예 소유자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하기로 하고 영국제국 내에서 노예제 폐지를 가결하였다.
다른 나라들도 영국의 예를 따라 프랑스는 1848년, 미국은 1865년, 쿠바는 1886년, 브라질은 1888년에 각각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는 법적 의미가 있을 뿐인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인 한계가 있는 것은, 흑인 노예는 법적 자유를 얻었을 뿐, 정치적 평등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성해방 운동에서도 흑인해방 운동이 여권신장에 영향이 미쳤으나 여성의 평등한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운동이 진행되고 부녀자들이 동참하면서 여성의 평등권 주장이나 지위 개선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성은 노예와 같이 법적인 불이익을 받은 것은,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으며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어 고등교육이 필요로 하는 전문직에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정부와 사회의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여권 옹호론자들은 영국, 프랑스, 북아메리카에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남성에게 허용되는 모든 권리를 여성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전개되었다.
1793년 파리에서 급진적 여성들로 구성된 “혁명공화 여성협회”가 결성되어 투표권 행사에 상관하지 않고 스스로 활동을 하였다.
19세기에 여권 운동은 사회개혁의 쟁점으로 부각되었으며, 1833년 필라델피아 여성 반노예제 협회가 결성되었으며, 여권주의자 회의에서 남성의 권리와 같은 권리를 여성에게도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12개 조를 결의를 하였다.
1860년대 이후 각국 여성은 자신들의 이익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조직적으로 여권운동을 전개하여 19세게 후반부터 여권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내용은 여권운동은 자선사업과 교육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여성의 극도의 빈곤, 가혹한 여권, 여성의 순결과 모성의 이상상 등이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여권운동은 정치적으로 남녀의 평등권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여성 노동자 조합운동을 중심으로 보수와 노동조건 등이었다.
그러나 여성은 전문직 취업의 어려움과 여성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다가 본격적인 여성의 권리 보장은 20세기의 전환기부터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성취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