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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사마천의 생애와 사상

사마천의 생애와 사상

사마천

1. 생애

 

사마천은 중국 서한(西漢) 시기의 위대한 역사학이며 문학가이면서 사상가로서 황토고원과 황하 유역에서 탄생한 큰 별이었다.

그의 탄생지인 섬서 한성시는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도시의 서한 좌풍현 외동향 고문 촌에서 BC145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6살에 소학에 들어갔으며, 집에서 12살부터 농사를 짓고 독서를 하면서 19살에 결사로 들어가기 전까지 주요 시간은 고문의 통독과 몸을 수련을 하였다.

그는 20살에 장유에 올랐으며 부친 사마담은 태사공이 되었으며, 24살에는 역사를 수찬 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25살에 동중서에게 공양학을 배웠으며 부친 사마담이 “태사공서”를 저술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28살에 처음으로 간대부를 설치하였으며, 처음으로 벼슬하여 낭이 되었으며, 31살에 부친 사마담이 “태사공서”를 저술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35살에 난중장으로 승진하여 사명을 받들고 파촉 이남으로 서정하여 서남이 지구에서 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었다.

그는 36살에 부친 사마담이 주남에서 병사하였으며, 그는 하락에서 부친의 유명을 받들었으며, 무제의 봉선을 수행하였다.

그는 37살에 무제의 순행을 호종하여 호자에 이르러 섶을 지고 황하를 막았으며, 그는 태사령이 되었을 때부터 “보임안서”를 지을 때까지 18년 동안 분발하여 책을 지었으며 “태사공서”가 기본적으로 탈고를 하였으며, 38살에는 태사령이 되어 역사 기록과 금궤 석실의 책을 모아 잠심 하여 “태사공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39살에 작심하여 역사를 저술하였으며, 40살에는 무제를 호종하여 남으로 구강에 이르러서 역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42살에 호수, 등평, 낙하굉 등과 함께 한나라의 태초력을 만들었으며, 그는 45살에 “태사공서”의 범위를 수정하였다.

그는 48살에 이릉의 집이 멸족을 당하자 그가 연좌되어 무고하게 죄를 쓰고 궁형을 당했으나, 49살에 출옥하여 중서령이 되었으나 세속에서는 총애를 높여 임직 하였다고 보지만, 그는 큰 치욕으로 보고 참으며 분발하여 책을 지었다.

그는 53세에 임안에게 편지를 써서 화를 당하고 “사기”를 기본적으로 탈고하여 “태사공서”로 이름을 정하였다.

그는 55살에 만년에 “태사공서”를 수정하거나 보충을 하였으며, 56살에는 “사기”를 수정하였다.

그는 59세에 그의 기사는 무제 말기에 그치며, 그는 60살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사마천의 죽음은 한무제와 처음과 끝을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사마천의 사상

 

1) 천인관

 

천인관계는 서한 초기 사상계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으로서, “하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사마천이 철학의 기본 문제를 제기한 명제인 것이다.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지금은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고대에는 상층 건축 영역에 속하는 중대한 문제로서, 하늘이 인사를 지배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서 통치권을 옹호하는 이론의 기초이며 통치계급의 관방철학이었다.

은주시대에는 종교 신학이 사상계를 주재하였으며, 하늘이 지고무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 은나라 사람들은 미신을 가장 많이 믿는 지상신과 조상신을 하나로 합쳐서 상제가 그들의 선조라고 생각하였다.

고대 사람들은 하늘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끼친다는 천인감응 설을 통치계급은 매우 중시하였으며, 이러한 배경과 분위기 속에서 사마천은 동중서를 사사하여 천명론과 천인감응설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사마천은 하늘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간의 사물을 주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대답은 유물주의적 영향을 띤다는 추상적으로 긍정하면서 구체적으로 부정하는 온후한 이원론적 생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천명론은 하늘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왕조의 흥망과 교체는 천명의 직용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의 이론 체계는 “하늘과 사람 사이를 탐구한 것은” 두 방면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설문”에서 나타내었으며, 그의 주요 사상의 경향은 하늘과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을 이야기하는ㄴ 것이 아니고 하늘과 사람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자연현상과 음양오행의 미신 설법을 구별했으며, 사실에 대한 실록의 구체적 논술을 통하여 천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삼대가 흉한 것은 누대에 걸쳐 덕을 쌓고 의를 행하여 천하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천관서”의 결말에서 “나라의 임금이 강대하고 덕이 있는 자는 번창하고, 약소하고 꾸며 속이는 자는 망한다고 했다.

결국, 사마천은 천인관계에서 결코 의지가 있는 “하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주요 사상의 경향은 깊이 믿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품은 것이며,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는 것을 세우는 것이었다.

 

2) 정치관

 

사천의 정치사상의 기본 경향은 유가의 “인정”을 창도함을 근본으로 하고, 도가의 “무위”로 도움을 겉으로 하는 통일체로서, 동시에 음양과 명, 법, 묵의 제가에 대해서 장점은 받아들이고 단점을 지양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경세치용 형에 속하며, 사변이론 형이 아니면서, 유가도 아니고 도가도 아닌 역사적 경험을 승화시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주요사상은 (1) 덕치를 숭상하고 폭정에 반대를 하면서 덕치와 폭정은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덕치를 숭상하고 폭정을 반대하였지만, 법치를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형법은 다스림의 근본이 아니어서 태평을 가져올 수 없으며 더욱이 가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2) 백성의 풍속을 따르고 무위정치를 송양할 것을 주장한 무위정치 이론은, 옛것을 그대로 따름을 쓰임으로 하는 것으로, 탐욕을 가지고 일을 벌어나가는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의 무위 학설에서 인순은 일종의 창신과 발전으로서, 인순은 소극적으로 모든 것을 이전의 관례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위적인 것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3) 분열과 할거를 반대하고 진한의 대일통을 송양하 다는, 청나라 전대흔을 말한 것은, 진나라를 누른 것, 한나라를 높인 것, 사실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는 한나라를 높인 것은 역사관에서 대일통을 주장하고, 정치관에서중앙집권제를 옹호하였다.

이러한 것은, 진나라의 통일 사업을 긍정한 것이고, 경제와 무제 대의 변경을 다스린 정책을 칭송한 것이었다.

 

3) 경제관

 

사마천의 경제관은 체계적인 상품경제의 특징을 고찰하여 경제와 정치, 경제와 도덕 민속의 관계를 고찰하여 생산을 발전시키고 교환을 확대하며 나라와 집을 부유하게 하는 경제이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사전(史傳)을 창시하고 농공상우를 중시하였으며, 창작한 경제 사전은 “평준서”와 “화식열전”이었다.

그는 한 초에서 무제 원년까지 거의 1세기의 경제발전과 재정정책을 개괄하였으며, “평준서”는 한 무제의 평준과 균주 정책을 중심적으로 평론하였으며, “화식열전”은 주인공이 상인으로서 화식이라 명명하여 화는 재부를 가리키며, 식은 재부를 어떻게 늘리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가 경제를 농단하는 정책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맡고 그 힘을 다하여하고자 하는 바를 얻는 시장경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화식열전”에서 상인의 활동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송하였으며 치생의 기술을 총결하였으며, 오로지 취렴을 일삼는 것이고 생산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욕망동력 설을 선양하여 가장 낮은 단계는 함께 다루는 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욕망은 인체의 감각기관이 물질에 대한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며 이는 생생하게 존재한다고 했다.

 

그는 경제 번영의 배후에 새로운 사회적 모순이 잠복해 있다는 것으로 보았으며, 사회 재부가 양극으로 분화하여 호족의 무리가 마을에서 날뛰며 통치 계급의 교만 사치한도가 없다고 했다.

경제 생산의 발전은 상인의 출현으로 농업과 수공업의 분업이 전제되었으며, 상인은 각지의 물산이 교류되도록 유통시켜 대대적으로 생산의 발전을 추진시켰고 “태사공서‘에서 말했다.

그는 상인을 인류의 정화로 간주하였으며, 그들이 사회의 발전에 대하여 공헌하였다고 했으며, 상품을 유통하여 재화를 증식하고, 자연지리의 경제와 상업 활동으로 생산발전이 되었다고 했다.

 

4) 역사관

 

사마천은 사회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여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였으며, 그의 대일통 역사관은, 중앙집권제도에 대해 합법적인 이론을 지어 주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역사발전 과정에 대한 승화이었다.

그의 관통한 역사 서술은 황제의 통일에서 한 무제의 대 일통까지이며 제왕의 덕업이 날로 더욱 흥성함을 상징하였다.

그는 “사기”에서 동중서의 “삼통순환론”을 지양하고 개조하여 역사는 부단히 변화와 발전한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역사관은 순환론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는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였으며, 인사와 역사를 사고하는 순환론에서 역사발전의 본질을 변화이며 부단히 진화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의 발전, 진화, 변혁의 역사관은 의론에서 표현되었으며 “사기”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선명하게 표현되었으며, 왕조의 교체와 제도의 수립, 대민 시정 등 각 방면에 모두 진보적인 역사관점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순환론을 지양하고 개선시켰으며, 순환론의 언어를 차용하여 역사의 “변”을 표현하여 발전하여 진화론의 역사관이 되었으며, 이는 그의 역사학의 일대 공헌이었다.

그는 역사가 어떻게 발전하여 나가고 변화하느냐는 것은 누가 역사를 창조하느냐에 달려 있지만, 2 원론적 색채를 갖추고 있으나 기본방향은 유물론 역사관이었다.

 

5) 전쟁관

 

사마천의 “사기”의 전쟁관은 고대의 가장 잘 갖추어진 전쟁사로서, 중국 고대 춘추전국 및 진초 과도기의 역사의 거대한 변화와 장기적인 전란의 시대를 5~6백 년 기간을 기록하였다.

그의 전쟁에 대한 기본관점은 전쟁은 포학한 자를 죽이고 위급을 구하는 자강의 도구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잃을 수도 있어서 신중히 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재에 대한 정의를 “율서”에서 전쟁은 성인이 강포함을 토벌하고 난세를 다스리고 적대 세력을 평정하고 위태로움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쟁은 “행함에 역과 순이 있다.”라고 생각하여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행하는 정의로운 전쟁은 칭찬하였고 이치를 거스르는 동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전쟁은 반대를 하였다.

 

전재에는 “씀에 교졸(巧拙)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업을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피아를 상세히 참고하여 신중하게 장상을 택하여 성실하게 용병 작전의 방략을 써야 한다고 했다.

사마천의 전쟁관을 형성한 역사적 영향은, 사마 씨의 가학에는 깊고 두터운 군사학의 연원이 있어 그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춘추전국 이래 병법학의 발전으로 체계적인 이론이 형성되었으며, 시세의 추이가 그로 하여금 군사학에 치중하게끔 되어 있었다.

 

6) 민족관

 

사마천의 민족관은 그의 진보적 역사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중국 역사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민족 사정을 창시하였던 것은. 예로부터 중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었으며, 중화 민족의 역사는 한족과 각 소수민족이 동동으로 창조한 역사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민족일통 사상의 기본내용은 민족 동렬사상, 중국 각 민족은 모두 황제의 자손, 주변 각 민족은 동등한 혁명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민족 등렬 사상은 오늘날 민족 평등 관념이 아니라 유가의 전통적인 인종이 다르고 구역이 달라도 내외의 차별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족 사전을 창시하여 국내외 민족을 구별하고, 국내 각 민족은 동등하게 모두 천자의 신민으로 분별하여 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각 민족이 모두 각자 역사 연원의 실체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고 각 민족이 모두 황제 자손이라는 것과 경제 문화 등 방면의 연계에서 각 민족의 역사 발정이 통일을 향해 돌아간다는 논증이었다.

결국, 그의 진보된 역사관과 서로 결합하여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고대 민족 일통사상의 조리를 상승시켜서 역사의 서사에서 더욱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7) 도덕관

 

사마천의 도덕관은 도덕 윤리를 “태사공서”에서 중시하였으며, “사기” 또한 “예의의 대종”인 도덕 전시라는 것을 은유하였다.

그는 “사기”에서 매우 광범위한 도덕 범주를 언급하였으며, 중국 고대의 민족 도덕과 도덕관념을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보적 도덕관 및 그가 칭송한 많은 인류 준칙과 빼어난 품석은 중국 정통문화의 귀중한 재부로서 민족성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는 “사기” “화식열전”에서 예는 유에서 생겨나고 무에서 폐한다고 한 것은, 예는 부유함에서 생기고 빈궁함에서 사라진다는 인식은 대한 한 유물사관이었다.

그는 화식을 칭송했고, 인욕은 물질과 재부를 창조하는 동력임을 알았으며, 모든 사람은 돈을 벌어 치부하도록 격려를 하였다.

 

그의 “소봉론”은 녹봉이나 작위와 복음의 수입이 없는데도 즐겁기가 비견한 사람을 소봉이라 하면서, 이는 돈이 있고 세력이 있어서 즐거움이 왕자와 같은 사람을 “송봉”으로서 무관의 왕이라 하였다.

이것은, 거만금을 가진 자는 곧 왕자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며, 사람이 부유해지면 인의가 거기에 붙는다는 것이다.

도덕은 사마천이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 중요한 표준이 되었으며, 그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회 윤리와 군신, 부자, 부부, 붕우 등 각종 인간관계, 영욕과 생사, 애국, 예양, 충의, 효제, 성신 등 각종 인생 관념을 묘사하여 모범이 되도록 하였다.

 

8. 인재관

 

사마천의 인재관은 처음으로 인물 중심의 기전체 역사를 창조하였기 때문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이론을 가진 인재학의 논자이었다.

그는 역사 인물의 공적과 덕행 및 그 성장 과정의 기술을 통하여 비교적 체계적으로 인재학의 사상을 표현하였다.

그는 인재를 “태사공서”에서 의를 부지함이 탁월하고 비범하며 스스로 때를 놓치지 않게 천하에 공명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천명론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으며 사람의 작용을 강조하면서 인재는 천성적인 것이 아니며 시세가 조성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인재 사상의 핵심적인 것은 현명한 인재를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 것이라고 했으며, 현자를 임용하여 능력자를 부려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재는 재덕을 겸비하는 것을 칭송했지만, 인 군에 대해서는 덕을 더욱 요구하였으며 충신과 양장에 대해서는 재산을 요구하였다.

결국, 사마천의 인재 사상 형성은 역사적 조건으로서 중국 고대의 인재학 연구는 실천이 이론에 앞섰던 것이다.

사마천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는 명언을 외쳤다.

 

3. 결 론

 

사마천은 국록을 받는 사관이었지만 개인적 입장에서 “사기”를 집필했으며, 그는 사상가로서 숭고한 인격과 창신의 정신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숭고한 인격과 창신의 정신의 표현은 치욕을 견디며 중대한 임무를 밭고 발분 하여 책을 지어 이상을 실현하였다.

그는 탐색과 창신에 용감하여 획기적인 기전체 통사를 창작하여 그것을 가지고 흥망성쇠의 이치를 상고하여 옛것을 보고 거울로 삼았으며, 신실하고 믿을 만한 역사에 엄격하게 충실하여 성인과 시비를 함께 하지를 않았다.

이 모든 그의 정신과 품격은 우리 모두가 계승하고 발양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