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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임진왜란에 관하여!

이순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관하여!

 

1. 임진왜란의 정의

 

임진왜란은 1592(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 전쟁이다.

1차 침입은 임진년에 일어났어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을 시켜서 임진왜란이라고 말한다.

 

2. 임진왜란 배경

 

조선 왕조의 임진왜란은 정치적으로 연산군 이후 명종 때의 4대 사화와 훈구, 사림세력 간의 정쟁으로 인하여 중앙정계의 혼란과 당쟁 등으로 정치적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군사적으로 국방 체제가 붕괴가 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 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가 재정의 허약한 상황에서 일본은 15세기 후반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을 받았다.

이때 도요토미(도요토미 히데요시)가(풍신수길)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시켰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어 조선과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부산포에 가신을 보내 통상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찬탈하는 일본을 거절하고 사신을 돌려보냈다.

일본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게 되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치자 1588년 조정에서는 문무반 2품직과 육조 참의 이상으로 중추부에서 가부를 재론하였으나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자 다치바나 일행을 돌려보냈다.

그 후, 몇 차례의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하자 일본은 사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 하자,, 다시 통신사 파견의 가부 논의를 했다.

그 후, 통신사 선정에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을 결정하여, 1593월 겐소 일행과 함께 출발했으나,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가서 만나지 못하다가 11월 접견을 하여 국서를 전했다.

도요토미의 답서는 4일 만에 경소를 떠나 계포구에서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으나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가져갈 수 없다고 하며 여러 가지 문지를 고쳐서 가져갔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은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모자라서 두려워할 것 없다고 했다.

이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같이 말하였으며, 김성일을 수행한 황진도는 분노하여 부사의 무망을 책했으며 결국, 동서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사실 여부보다 자당의 사절을 비호했다..

조정은 요행을 바라며 반신반의하다가 김성일 의견에 기울이게 되어 각도에 성을 쌓는 일 등 방비를 중지했다.

조선에 머물던 겐소는 선사 위 오억령에게 일본은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일본의 발병이 확실하다고 왕에게 보고하여 파직을 당했다.

일본은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하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뒤 일본은 왜관에 일본인 등을 소환하자 조선은 일본침입을 알아차리고 경상감사, 전라감사, 충청감사는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를 수축했다.

신립을 경기, 황해도, 이일을 충청,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했으나 때를 놓쳤다고 백성들에게 원만만 사게 됐으며, 전라 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일본침입을 대비했다.

3. 임진란 발생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원정군을 99번대로 나누어 각 대를 지휘할 주장과 병력을 나누어 전체 총병력은 30여만 명이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은 무능한 관군이 왜군의 침략을 막지 못하자 왕은 피난을 가게 되고 왜군들은 고을마다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하자 조선 8도 전역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왜군을 격파했다.

이러한 의병의 황동 동기는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왜군에 짓밟히고 죄 없는 백성의 생명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수군의 활약은 난이 발발하자 경상 우수사 원군의 함대가 전멸하다시피 되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 능력으로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4. 조 명군의 반격과 휴전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국경수비병을 파병했다.

심유경이 왜군과의 화의 교섭을 맡게 되자 평양에서 고니시와 강화조건으로 왜군은 평양 이상 침입하지 않고, 조선군은 남쪽에 작전하지 않기로 하였다.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이여송을 동정 제독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냈다.

조명 연합군이 명렬한 공격을 감행하자 고니시 등은 패주를 하여 개성으로 철수하자 좌의정 유성룡은 이시언과 김경로를 시켜 고니시 군의 퇴로를 끊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평양성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있었으나, 여석령 전투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을 때 권율은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하면서, 행주산성에서 일본 대군과 격전 끝에 대승했다.

김시민의 진주 싸움, 이순신의 한산도 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 첩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서 2, 3년간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화의 했으나 결렬되었다.

1596년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의 침략을 꾀하였다.

5. 정유재란

 

1597년 일본은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으로 가토, 고니시 등 장수로 한 1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에서는 한산도 통제영으로 남해안을 지켜오던 수군 이순신을 무고로 하옥하고, 전라 좌수사 겸 통제사 후임에 원군을 임명했다.

북상하는 일본군에 원군이 패사 한 뒤 다시 통제사로 이순신을 기용하여 소사평의 대첩이 후에,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이순신은 노량에서 적의 스마즈의 병선 500척을 맞아 격전을 벌이면서, 적함대 절반을 분파하고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결국,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해지자, 급히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7년간의 조일 전쟁은 끝이 났다.

 

6. 결과

 

7년간의 임진왜란은 조선, 명나라, 일본 등 삼국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으며, 조선은 사회 난의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인명의 손상과 전야의 황폐화로 전국에 경지 면적의 축소와 군량미 조달을 위한 납속책 시행과 종래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 해져 갔다.

문화재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 창더궁, 창경궁 등 많은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 등 소실과 약탈되었으며,, 역대 실록 중 사서를 보관하는 전주 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