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의 역사적 변천
1. 선비의 개념
선비의 개념은 어질고 지식이 있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호칭을 하면서,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신분계층을 말한다.
2. 선비정신의 역사적 변천
삼국시대의 초부터 유교문화의 유입으로 선비의 덕성에 관한 이해가 성장하면서, 고구려 시대는 을파소라는 선비는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을 하는 것이 떳떳한 일이라 하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는 태학을 세워 유교이념을 교육시켜 선비를 양성하였으며, 7세기의 신라시대의 설총선비는 이두를 지어 경전을 해설하는 등 유교 교육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통일 시라 시대의 최치원은 아찬에 벼슬에 임명된 것은 성골과 진골이 아닌 선비가 오를 수 있는 관직은 6두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는 도학이념이 정립되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도학 이념을 가진 선비들이 성장하였다.(이색, 정몽주 등)
조선 초에는 유교이념이 통치 원리로써 선비들은 유교이념으로 자기 확신을 정립하면서, 고려 말의 정몽주를 추존하였으며, 절개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통을 선비 의식으로 강화시켰다.
조선시대는 유교이념이 지배적인 시대로서 선비들의 정치적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여 사림정치시대를 형성하였다.
이때의 선비정신의 핵심은 유교이념을 수호하는 임무를 지녔으므로 유교이념 자체가 선비정신이었다.
선비정신은 부와 귀의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인의의 유교이념을 신봉하는 것으로서, 선비가 지향하는 가치는 인간의 성품에 내재된 “의”를 추구하는 의리정신이었다.
삼국시대의 시라 시대는 화랑들에게 선비정신을 볼 수 있었으며, 백제의 황산벌 전장에서 김흠춘은 아들을 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충성과 효도를 아울러 이룰 수 있다.”는 훈계를 하는 선비정신이 있었다.
즉, 선비정신은 의리 정신으로 표현하는데서 의리는 변하지 않는 강인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의 조광조의 선비정신은 “무릇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며, 일을 당할 경우 과감히 실행하고 환난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바른 선비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근대의 선비정신은 도학이 정착하면서, 선비 의식은 선명하고 자각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사회적으로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선비가 정치로 부상하여 사림정치를 하여 선조 때에는 사림들 자체가 내부 분열로 대립을 하였으며, 당쟁으로 인한 당파로 분열되면서 정치권력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살육전을 일으켰으며, 이때의 선비정신은 기본이념에 따라 군자와 소인 론으로 비판을 하게 되었다.
선비가 실질적인 권력의 지배자로서 서민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선비의 타락상이었으며, 선비의 진실한 모습을 상실하였다.
반면, 선비로서 유식 계층은 비도덕적인 것을 비판하였으며, 정약용은 “선비란 손발을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땅에서 생산되는 것을 삼키며, 남의 힘으로 먹는가?”라고 선비의 무위도식을 힐난하였다.
현대적 선비정신으로서는, 선비는 언제나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요 지성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선비정신은 현실적, 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갖는 것이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성찰 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중심 구실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선비는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시대사 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과 인격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