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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한국정치사상의 개념과 변천

한국정치사상의 개념과 변천

1. 정치사상의 개념

정치사상이라 함은, 국가의 통치와 국민의 정치행위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정치에 관한 사상을 의미한다.

한국의 정치사상은 공동체 조직의 종교 사상과 혼합된 상태에서 고대로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새로운 가치 기준의 정치사상으로 시대별로 변천하였다.

사상가

2. 정치사상의 변천

1) 고대의 정치사상

고대는 농경생활이 정착되면서, 최초의 정치사회로 되면서, 지배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설화가 탄생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로서, 최초의 국가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시조인 태양신인 환인의 손자로서 모든 인간사를 주재하는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의 설화이었다.

2) 삼국시대의 정치사상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로서, 왕의 정치적 권위가 고양되었으며, 새로이 귀족들의 합의제에 의하여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권한을 가졌지만, 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왕의 권한과 지위가 크게 높았었다.

이 시대의 정치사상은 충군애민사상의 대두되어 왕에 대한 충성이 모든 백성들에게 강조되고 덕목이었다.

예를 들면, 화랑도의 세속오계 등이다.

3) 고려시대의 정치사상

신라의 통치범위를 벗어난 각 지역의 다양한 호족들의 정치사상과 불교의 화엄종 등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맞서 대립과 갈등을 가져왔다.

고려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확립되고, 당. 송의 정치제도가 채택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로서 유교적 정치사상이 이루어졌다.

고려 성종 때는 정치적 행적을 비판하고 구체적 정책을 건의하는 시무 28조가 생성되었다.

특히,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와 복종의 정치사상이 강조되었으며, 효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충(忠)이라 하였다.

그 후에 유교적 정치사상은 무너지고 농민반란이 발생하면서, 신분해방을 주장하며 “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때가 오면 누구든 할 수 있다.”는 신분해방으로 노비 없는 사회 건설을 하는 사상이었다.

고려 후반기에는 대몽항쟁으로 정치의 장래가 불안정한 생활에서 신흥 사대부들에 의하여 보수적 기반이 강한 권문세족에 대항하는 성리학적인 경세론이 등장하였다.

이는 정치적, 경제적인 모순의 극대화된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는 상소문이었다.

4) 조선시대의 정치사상

조선시대의 정치사상은 불교를 비판하고 혁명론을 개진하는 새 왕조의 이념 확립을 위한 정도전의 민본주의의 재상정 치사상이 등장하였다.

이는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맞서 정치적 투쟁을 하면서, 성리학의 우주론과 인성론을 받아들이면서, 그 이론체계 위에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그는 민본주의에 입각한 권력론을 주장하고 왕의 상징성을 전제로 한 재상 중심 정치론을 내세웠다.

그는 “왕은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함으로써,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왕의 하늘이다.”라고 하면서, 왕보다 국가가 우선하고, 국가보다 백성이 우선하므로 백성의 존재는 왕에게 하늘이 된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정치에 있어 통치자나 통치권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이때는 국가의 법제나 시설은 정치적 기복이 심한 시대로서, 세조 때는 왕권 강화책과 부국 강변 책을 추진하였으며, 이를 위해 “경국대전”이 편찬되었다.

조선사회에서는 유교 화가 심화되면서 도학 정치론에 의존하였으며, 조선왕조의 지배 이념으로서의 정치사상은 성리학으로 발전하면서, 우주론과 심성론 분야에서 철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 성리학을 모태로 하여 실학의 정치사상은 정치, 경제, 역사 등 인문,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와 자연과학의 학문적 발달을 가져오게 하였다.

5) 근. 현대 시대의 정치사상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천명 덕치의 통치이념 위에서 운영해오던 것이, 내부적 질서와 균형을 상실하면서 약화가 되었다.

대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아 온 정치사상의 계보는 위정척사의 정치사상, 개화의 정치사상, 동학의 정치사상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에서 위정척사의 정치사상은 조선조의 통치이념으로서 전통적인 성리학의 의미에서 정치체제의 대표적 정치사상이었다.

이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 항으로서 통치자의 극기정신, 양화, 양물의 배척 금단의 세의 도전에 대한 주보정 벌이었다.

이러한 위정척사의 이념적 지주는 민비 시해 사건, 단발령으로 인한 을미의병운동 등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 후, 1894년 최제우의 민족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반침략, 반봉건의 정치이념인 동학농민 봉기 사상이었다.

이러한 동학사상은 특정 왕조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천일여의 평등사상으로서 보국안민을 위해서 모든 계층의 백성이 동 귀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인내천의 평등사상이었다.

서양문물의 정보를 접하면서, 진보적인 정치사상으로 형성되어 나가는 개화사상이 생성되었으나, 처음은 영향력이 없었으나, 강화도조약 체결 후, 개화 사상가들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과 대립을 하였다.

개화사상의 온건파인 김홍집, 어윤중 등은 서양의 우수한 기술은 수용하되 점진적으로 정치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급진파인 김옥균, 박영호 등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이 급진적인 개방노선으로 변혁을 주장하였으며, 온건파는 사대당, 급진파는 개화당이라고 불렸다.

이와 같이 두 파의 정치적 대립 상태에서 1884년 12월 개화당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정부로 끝나며 몰락하였다.

이후, 1905년부터 8. 15 광복까지는 일본의 식민지에 대한 반 식민 투쟁을 중심으로 저항적 민주주의의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미. 소 양국의 군대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냉전체제로 분단이 고착화되었으며,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정치체제가 수립되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