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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비스마르크의 생애와 정치사상

비스마르크(Bismarck)의 생애와 정치사상

1. 생애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1815년 4월 1일 독일 쇤 하우젠에서 지방의 귀족 출신 가문에서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와 루이제 빌헬이네, 처녀성 멘켄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크의 어린 시절은 영지 저택의 장엄한 정원에서 나무와 숲 속에서 낙원 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는 6살부터 대도시의 기술학교에 다니면서, 가정교사의 외국어의 가르침으로 완벽한 프랑스어와 영어실력이 뛰어 난 청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펜싱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승마선수와 수영을 잘했으나 전공에는 별관심이 없었으며, 오페라를 좋아하고, 프랑스어와 영어를 즐겨 썼었으며, 베를린의 귀족 사교계를 휘어잡는 활달하고 박식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베를린 플라만 사립학교를 졸업한 후, 베를린에서 법학과 국가학을 전공했으며, 포츠담에서 관리연수과정을 다녔다.(1822~1838)

그는 1847년 통합신분제의회 의원으로 5월 12일 선출되었으며, 루이제 빌 헬미네 멘켄과 7월 28일 결혼을 했다.

그는 1848년 12월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50년 에르푸르트 연합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는 1862년 5월 파리주제 프로이센 사절과 9월 23일 군대와 헌법문제로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프로이센의 수상의 부름을 받았다.

 

1866년 5년 7일 비스마르크의 암살시도가 있었으며, 1867년에 연방수상에 지명이 되었다.

1871년 그는 제국수상, 제후 작위를 받았으며, 작센 발트 영지를 하사 받았으며, 1872년 문화투쟁을 시작하여, 1873년 삼제동맹을 결성했으며, 1874년 7월 13일 커싱겐에서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

1890년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단절로 3월 20일 수상직을 퇴임했으나, 1894년 빌헬름 2세와 형식적 화해를 했다.

그는 1898년 7월 30일 사망을 했다.

 

2. 비스마르크의 정치사상

 

비스마르크는 처음은 정치생활의 중심적인 인물이었지만, 정치성향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독일의 많은 정치적 갈등인 “함바흐 축제”와 “프랑크푸르트 경비대 습격” 등으로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진영의 대립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1847년 소집된 “통합신분제의회”에 진출하면서, 영주에서 정치가로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32세 최연소의원으로서, 성문헌법의 필요성과 열망을 강조했으며, 나폴레옹에 저항한 투쟁의 동기 등을 역설했다.

그는 보수진영의 정치연설가로서 인맥을 확장하며 정파의 지도급 인사로 성장하면서, 보수파의 대변인으로서 유대인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유대인의 공직만 제외하고는 모든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보수를 대변하는 신문창간의 핵심 동기는 기존 법질서를 수호하고 유지하면서, 이 법질서를 향한 일간지나 관료, 야당이 감행하는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궁정당의 실세는 아니었으나 부관으로서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하여 장관 후보자 명단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면서, 반동적인 선동가라는 평판을 받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헌법의 인정, 무정부상태를 막으려는 투쟁, 법 앞에 평등, 재산에 따른 세금 부과였다.

그는 1862년 수상과 외무장관이 되면서, 정치가로서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럽의 탁월한 정치지도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은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힘을 주목해야 하며, 우리의 결단은 철과 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자유주의의 신문들은 국내 정치의 갈등을 외교 무대로 돌려 무력 통치를 할러는 수작이라고 비판을 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충분히 강한 힘을 갖추고 나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이 평화를 가져오는 원칙이라는 정치사상이었다.

그는 1890년 3월 20일 수상직을 퇴임하자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가 없어도 국가는 굴러가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독일제국을 창설하는 데 성공한 정치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