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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모택동의 정치사상(2. 홍군의 대장정)

모택동

모택동의 정치사상(2. 홍 군의 대장정)

2. 홍군의 대장정(大長征)

모택동은 징강 산에서 부대를 지원병으로 구성하고, 이들이 농민과 민간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운영방침을 세운 것이, 중국 공산당 군대인 홍 군, 팔로군, 신사군, 인민해방군의 원칙이 되었다.

징강 산에서 그의 활약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인물들이 합류하여, 1928년 에 홍군은 5군으로 편성하여 3년 동안 존재하면서, 홍 군의 활동으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농민에 대한 토지 무상 재 배분 정책과 규율로 농민들에게 호응을 받아 사기가 높아지면서, 국민당 군대(백군)의 초 공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장개석의 초공작전이 1차로 1930년 말로 10만 명의 국민당 백군의 공격을 모두 5 차 래나 공격하였으나, 홍 군이 3 차 래나 승리를 함으로써, 1931년 12월 11일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주석과 중앙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고, 지방과 도시를 공격하여 홍 군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키워나갔다.

1933년 4월 장개석은 4차 초공 전에서 자기 생애의 최대의 치욕을 격은 패배를 하자, 1933년 9월 장개석은 다시 100만 명의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5차 초공 전을 벌렸다.

홍 군은 기존의 모택동의 전술인 상대를 먼저 치고 빠지는 유격 전술을 버리고, 현 위치만 사수함으로써, 전투에서 패배를 하여 훗날 역사적인 평가를 받은 대장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4년 10월 17일 공산당은 약 8만 6천여 명의 홍군과 중앙 정부와 공산당 요원이 장시성 남부의 위두에 집결하여 루진에서 목적지인 연안을 향한 장도의 길에 올랐다.

대장정

공산당이 장정(長征)에 오르면서, 국민당측이 알았을 경우에는 홍 군이 벌써 빠져나가고 며칠이 지난 뒤였다.

징강 산과 루이진의 근거지를 8만 6천여 명이 탈출하였으나, 상강의 도하 전투에서 패배로 홍 군이 3만여 명의 남을 정도로 수많은 희생을 가져왔다.

상강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1934년 12월 12일 정치국 긴급회의에서 모택동은 후난 서북쪽으로 가는 중앙당의 원래 계획을 반대하면서, 구이저우 성으로 갈 것을 주장하였다.

홍 군은 기만적인 기동작전으로 낮에는 쉬고 밤에는 행군하는 전술을 펼치면서, 국민당의 비행기가 홍 군의 주력부대를 공격할 수 없도록 만들면서 강행하였다.

리평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홍군은 오강을 도강하여, 1935년 1월 7일 구이저우 북쪽의 주요 도시인 쭌이를 점령하였다.

홍 군은 쭌이를 점령한 후, 모택동은 1935년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중앙정부 집행위원으로 되었다.

 

그는 회의에서 국민당 제5차 포위공격에 대한 공산당 전술이 유격전이 아닌 진지전을 택한 것과 탈출과정도 전략적 후퇴가 아닌 맹목적 도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력히 비판을 했었다.

회의 결과는 당 중앙위원회는 보구의 총서기직과 리더(오토 브라운)의 군사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고, 모택동을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대장정 중에 당과 군대의 지도적 지휘가 확립됨으로써,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로서의 위치가 확립되었다.

그 후, 홍군을 지휘하는 모택동은 구이양에서 20리 떨어진 비행장을 점령을 하였으나, 여려 차래 국민당 군과의 혼전을 거듭하면서, 100킬로 이상을 행군하는 가운데도 대열을 정비하여, 금사강을 도하작전으로 국민당 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후에 루딩교를 건넜다.

홍 군의 대장정은 국민당 군의 추격으로 인한 전투와 도주의 연속은 설산과 습지 등 대자연을 극복하는 고난의 행군이 되었다.

대장정의 홍군

모택동은 홍 군과 같이 새하얀 눈발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해발 5,500미터의 쿤룬산맥을 정신력으로 넘으면서, 보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쿤룬을 세 토막 내어 유럽, 미국, 동방에 보내겠다는 영웅다운 강인한 자신감으로 소리를 쳤다.

홍 군은 죽음의 늪을 지나고 험한 협곡과 산맥을 넘어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어가며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1935년 10월 19일 중앙 홍 군을 이끌고 더디어 산시성 바오안 현의 좁은 산골짝에 있는 우치진에 도착한 모택동은 가슴 벅찬 목소리로 “장정은 승리했다.”라고 선언을 하였다.

모택동과 홍군의 대장정은 장시성 위두를 출발한 지 367일 째로서, 행군의 거리는 약 1만 5천 킬로 미터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홍 군은 11개의 성을 통과하고, 18개의 산맥과 24개의 큰 강을 건너서 죽음의 습지를 건고 행군한 것이었다.

죽음을 무릅쓴 대장정은 깜깜한 어둠에 쌓여 있던 중국에게는 아침햇살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 무렵 모택동은 1년 전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대항하는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인민이 단결을 하여 항일정책을 주장하자, 지식인과 학생들 중심으로 열풍이 고조되었으며, 공산당은 언론을 통하여 “항일 민족통일 전선 공작”이란 선전공작을 확산시켜나갔다.

홍군의 간부

반면, 장개석은 만주를 침략한 일본보다 장시성에 있는 홍군을 먼저 공격할러는 정책을 씀으로써, 만주지역의 병권을 쥐고 있던 장학량은 일본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말라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공산당은 장학량에게 항일공동전선을 제안하는 것은, 장정을 통한 열악한 근거지를 회복키 위한 시간이 필요했으며, 장학량 입장에서는 홍 군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 패하여 공산당 전투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부친 장작림이 열차에서 일본군에 의해 폭살당하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오른 처지에 놓여있었다.

1936년 4월 9일 공산당 제안에 동조한 장학량은 장개석 몰래 이극농의 주선으로 천주교 교회당에서 이튿날을 새벽까지 철야 회담으로 항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암묵적으로 합의를 하였다.

1936년 12월 9일 전국적인 항일반대 시위가 베이징에서 일어난 1주년 기념하기 위하여 1만여 명 학생들이 시안 역에서 내전 종식과 대일 항전에 대한 기습시위가 일어났다.

대장정의 행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