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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모택동의 정치사상(3. 국공합작)

 

모택동

3. 국공합작

중국의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1936년 12월 12일 국민당 부사령관인 장학량이 홍 군과의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방문한 장개석을 납치. 구금한 사건이 일어났다.

모택동은 이 사건으로 장개석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지만, 중공 지도부와의 논의 끝에 평화적으로 처리하기로 당론을 모았으며, 12월 15일 연명으로 시안사변에 대한 국민당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장학량이 제기한 8개 주장을 지지하였다.

장학량은 포로가 된 장개석 신변처리에 골몰하고 있던 중에도, 장개석에게 내전 종식과 항일을 권유했지만, 오히려 심한 핀잔만 들었다.

 

지역 국민당 사령관이 항명으로 총사령관인 장개석의 구금 소식은 온 중국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장개석의 아내 송미령과 오빠인 송자문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앞장서 나섰다.

장개석은 자신이 조심하지 않아 뜻밖의 재난을 당한다며, 3통의 유서까지 써서 아내와 국민들에 보냈다.

유서에는 “한 번 죽음으로써 국민당과 국가, 인민에게 보답하고, 혁명 당원에게 부끄럽지 않기 바라며, 중화민족은 부흥의 날이 온다.”로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결연한 유서였다.

결국, 장개석은 내전을 멈추고 항일을 해야 된다는 도널드와 장학량의 설득에도 듣지 않다가 같이 구금된 천청 등 국민당 군 장군들의 건의를 받아 들어 협상하기로 하였다.

중공 중앙지도부의 강경파는, 이 번 기회에 철천지원수인 장개석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실리 파는 소련의 의견을 확인하고, 평화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논쟁이 이어졌다.

소련의 스탈린은 장개석은 중국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처형되면, 중국이 분열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안전하게 풀려나오도록 명령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러한 연유는 시안사건 한 달 전에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삼국이 동맹을 맺었으므로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중국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만 했었다.

여군

12월 17일 저우 등 중공 중앙의 대표자들은 장학량이 보낸 전용기를 타고 시안에 도착하여 사태 해결을 위한 토론을 하면서, 장개석을 살리면서, 내전을 피하고 국공이 힘을 합쳐 항일에 나선다는 합의를 많은 시간 끝에 이루어졌다.

국공합작은 공산당을 두려워하는 장개석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항일을 명분으로 하여 성사가 된 것이었다.

회담이 성사되자 성탄절 전날 밤에 저우는 장개석을 만나려 간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각별한 인연은 10여 년 전 황푸 군관학교에서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을 때에 저우는 정치부주임이었다.

장개석은 저우를 보며 더 이상 내전은 안 된다며, 우리 적이지만, 항상 저우를 생각했다고 하자, 저우는 공산당원들도 중국의 항일 영도자로 지지한다고 화답하였다.

12월 25일 풀려난 장개석은 시안사변의 주동자인 장학량을 대동하여 난징으로 돌아가는데, 저우는 장학량을 보고 난징에 가면 필히 장개석에게 보복을 당한다고 극구 말렸다.

장학량은 사변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니 항명한 군인으로서 당당하게 처벌을 받겠다며, 체면을 내세워 난징으로 갔다.

결국, 장학량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형의 선고를 받고 사면조치가 되었으나, 평생을 가택연금 상태에서 53년 동안 지내다가 하와이에서 노한으로 103세에 사망을 하였다.

장개석은 합의 문서에 구두 상으로 약속하면서, 끝까지 서명을 하지 않았으며, 중국을 대표하는 총통의 위상을 갖추었다.

팔로군

시안사변 직후,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제2차 국공합작을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이득을 보면서, 가장 척박한 산시성 옌안의 황토고원에서 홍 군의 강한 근거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군사역량을 강화하며 발전시켜, 모택동의 당내 입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서한을 발표하고, 보증을 요구한 내용은 내전 중지와 일치 항일,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과 정치범 석방, 모든 당파와 군대의 대표자회의 소집과 공동 구국의 실현, 대일 항전 준비, 공작의 신속한 완성, 인민생활의 개선 등이었다.

이러한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진다면,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무장폭동 중지, 소비에트 자치정부의 명칭을 중화민국 특구로 개칭하며, 홍 군도 국민혁명군의 편제에 따르겠으며, 민주제도를 실시하고 지주의 토지 몰수를 중단하는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중일전쟁의 계기로 신속히 협의되어, 9월 22일 국민당 중앙당 중아 통신은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고 선포하고, 장개석은 23일 담화를 내고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하였다.

2차 국공합작의 협약에 따라 공산당 홍 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불리는 항일 부대로 편성하여 국민당 군대와 공동전선을 펼치며 항일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국공합작으로 군부대 재편성뿐만 아니라 행정구역도 협의를 모아서 소비에트 자치지역을 특별구로 지정받고 두 개의 연구를 운영하게 되었다.

항일에 대한 열망은 국민당과 공산당은 물론, 중국 인민, 노동자, 학생 등 전 계층에서 일치단결로 뭉치게 되어 대일 항전이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1937년 8월 9일 일본 해병대 중위와 사병이 상하이 홍차오 비행장으로 난입하다가 중국군 수비대에 사살되는 사건으로 중일 양국의 상하이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단호한 조치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선언하고, 육상 전투기로 외국인의 조계지를 제외하고 시내 곳곳에 무차별 폭격을 하였다.

상하이를 수비하던 국민 정부군은 최정예부대와 중국 공군 전투기로 일본 육상 전투기를 격추시켜 위용을 떨치자,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군사적 요충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육탄전을 벌이면서, 쌍방이 진지를 두고 뺏고 빼앗기는 고지 전을 벌린 전투가 되었다.

일본군은 계속 증원 군을 요청하여 전세가 유리한 방향으로 가자 장개석은 총사령관을 맡아 상하이 전투를 진두지휘를 하였으나 양국 모두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전면전을 벌렸다.

이런 연유는 선전포고를 하면, 미국의 중립법(Neutrality Act) 적용을 받아서, 선전포고를 하는 교전국에는 경제제재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1941년에 국제여론, 무기거래, 중립국 조계지 및 자국 교민 등의 요인으로 정식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피난길

중국군은 10월 26일 대창 전투에서 결사항전으로 싸웠으나 실패하여 일본군을 막기는 역부족이 되자, 1937년 11월 11일 상하이가 함락되었으며, 국민당 정부는 임시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1937년 12월 13일 무주공산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살육하고, 6주간의 짧은 기간에 약 30만여 명 “난징대학살”사건이라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더욱이 여성들이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은 수만 명이었고, 건물은 80%가 넘게 파괴되거나 불타버렸다.

공산당의 팔로군이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값진 첫 승리를 한 것은 일본군 5사단 1,000여 명을 전멸시키고 탄약과 무기를 대량 획득한 것이며, 팔로군의 전술은 산간 유격전 위주로 치고 빠지며, 일본군에 기습 공격하는 전투를 하여 승리를 한 것이었다.

모택동의 전술은 팔로군 병력을 투입하는 전투는 자신의 동의 없이 싸움에서 승리를 해도 질책하면서, 마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기보다 팔로군의 전력을 최대한 확장하고 보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공산당 세력이 급속도로 평창 하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불안감을 느낀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신사군을 일본군 배후지역으로 이동하다가 급습을 당해 중과 부족으로 겨우 몇 천 명이 살아나서 도주하는 상항이 벌어졌다.

공산당 중앙이 주체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항일 통일전선 요구에 발맞추어 공농공화국을 인민공화국을 바꾸면서,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는 정책을 확정하였다.

대장정

당 중앙과 홍 군은 1937년 산시성 연안에서 혁명군 근거지를 구축하였으며, 모택동은 마을 서쪽 펑황산 기슭에 야오동이라 불리는 토굴집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모택동은 여기에서 서양 춤을 가르치는 스메들리와 배우 활동을 하는 리리우와 가까이하며 사귀었어나 옌안에 나쁜 소문이 나자 허쯔전과 이혼을 결정하고 당 중앙에 처리를 요청하였다.

때마침, 7월 7일 항일전쟁 사건이 터지자 연안은 전시상태가 되어 당 중앙은 신속하게 이혼을 승인하였다.

모택동은 좋아했던 여성들과 허쯔전을 보내고 난 뒤에 1938년 11월에 연극배우인 강청과 결혼을 하였다.

당 중앙과 홍 군이 들어와 근거지가 안착되면서, 연안은 꿈과 희망의 도시로 변해갔으며, 중앙당교, 항일 군사 정치대학, 예술학원, 청년 훈련반, 교육, 선전, 출판, 여성문제 등 각 분야에서 세력이 확장되었다.

1938년 6월 9일 장개석은 일본군이 우한의 북쪽으로 공격해오자, 이를 막기 위해 항하 제방을 폭파함으로써, 물이 범람하여 많은 중국 인민들만 대재앙을 겪게 되었다.

장개석은 우한이 점령된 직후에도 방어 전략을 펼쳤으나 전세가 악화되자 땅을 태워 항전하는 전략으로 창사 대화재를 일으켜 5일 동안 화재로 많은 인명사상과 가옥이 불타버렸다.

공산당  홍군

일본군은 우한 점령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병력, 전투물자를 전력을 다해 쏟아부어서 광우저와 우한을 점령하였으며, 1939년 2월 중국 최남단의 휴양도시 하이난과 동남부의 주요 도시를 거의 점령을 하였으나, 일본군은 중국의 넓은 지역을 관리하면서, 전투를 해야 하므로 점점 더 곤경에 빠져들어 가게 되었다.

모택동은 1941년 5월 고위간부회의에서 학풍과 당의 기풍을 바로 잡자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중국 현실을 무시하는 주관주의, 형식주의, 기강을 바로잡는 연설을 하면서, 1942년부터 1945년 봄까지 3년을 학풍, 당풍, 문풍이라는 3풍을 목표로 본격적인 정풍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3월 모택동은 정치국과 중앙위원회 주석, 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선출되어 당정군의 중국 공산당의 최종결정권자가 됨으로써, 중국공산당 정책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유기 소는 모택동의 사상과 사상체계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으며, 모택동의 혁명적 사상은 실천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군사상 발전을 위한 논리이자 행동지침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신민주 주주의 혁명, 항일전쟁, 국공내전 승리, 중화인민국 수립이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와 혁명의 주체는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촌 농민이라고 했었다.

장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