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정치사상(1. 젊은 시절)
1. 젊은 시절
모택동은 중국 남부에 위치한 허난성 샹탄현 샤오산에서 1893년 12월 26일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2년 동안 서당에 다니면서 한자를 읽었으며, 부친은 빈농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해서 부자 소리를 들었으나, 모친은 친절하고 너그러우면서 동정심이 많아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부친에 대한 존경심이나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여 적대감을 느끼는 반항심이 많은 아이로 성장하였다.
이런 그를 보고 부친은 언제나 게으로고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을 함으로써,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항아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부터 반항심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그는 나이 9세부터 아버지의 지시에 의하여 일하면서, 사숙의 지도하에 논어, 맹자, 대학,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등을 비롯하여 세계의 영웅전을 비롯하여 여사 지리 등을 섭렵하였다.
1907년 이웃마을 부모가 정해준 4살 연상인 나일수와 결혼을 하였으나, 신부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직 수많은 책을 독파하면서, 사서삼경, 수호전, 삼국연의, 서유기 등을 외우는 정도로 읽어서 누구와의 대화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의 독서법은 세 번 반복하여 읽고, 네 번을 익히라는 삼복사온(三復四溫)의 독서법으로서, 붓을 움직이라는 원칙을 지키라는 것은, 내용에 대한 요점을 정리하고,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곳에 표기를 하면서, 주를 달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독서는 읽기의 진도를 일기형식으로 기록했으며, 책의 내용이 잘 못된 것을 바로 잡았으며,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여, 많이 물으라는 사다(四多) 공부법을 실천했었다.
그는 14세, 15세 때에 정관응이 지은 “성세 위언(盛世危言)”을 읽고 낡은 중국과 다른 새로운 중국이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09년 그는 15세 때에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 25킬로나 떨어진 동산 국민학교에 친척에게 돈을 빌려서 입학을 하려고 하였으나, 나이가 많다고 거절을 당하자 간절히 애원한 덕분에 임시 학생의 자격으로 입학허가를 받았다.
학교에 임시 입학한 그는 수호지와 삼국지만 가지고 학교에 들어와서 학교에 다니던 중에 담임선생과 교장과의 삼국지 정사(正史)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그가 교장의 배척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여 퇴교처분을 당하였다.
1911년 18세 때에 동산국민학교에 퇴교당한 그는 창사의 상향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민립보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신문에 실린 반 청론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10일 청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태인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후난성에 계엄이 선포되고 창사에도 무장봉기가 일어나 청 왕조에 대한 독립을 선포되었다.
그는 창사의 무장봉기군의 일원으로 여원홍의 혁명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하다가 혁명이 마무리되어 제대한 후에는 공립 고급상업학교인 제1중학에 입학을 했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는 스스로 공부계획을 세우고 후난성 도서관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국부론, 법의 정신, 민약론, 진화론, 논리학 등을 독서하면서, 당시 강대국인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역사서적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예작품을 읽었다.
1913년 그는 20세가 되어서 본격적인 배움의 길로 들어서면서, 시인이며 문필가의 평을 받을 경지에 들어섰으며, 그는 1914년 정부에 의해 그는 제1사범학교 예과 제3반에 편입되었고, 가을에 본과 8반에 되었다.
그는 영어, 수학, 자연과학은 관심이 없었으며, 글쓰기, 작문을 좋아하여 도서관에 묻혀 살았으며, 그의 필명이 성명 획수를 암시하는 이십팔 획 생이었다.
1918년 4월 14일 24세 때에는 10여명의 동지들과 구국 구민을 위한 단체 “신민 학회”를 만들어서 회원을 70~80명을 확보하여, 학회의 목적은 학술을 혁신하고 품행을 닦고, 민심과 풍속을 개량하는데 두었다.
1918년 6월 그는 후난제일사범학교를 5년 만에 졸업을 하자마자, 베이징 양창지 교수로부터 프랑스의 유학기 회의 서신을 받았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포기를 하고, 신청년회의 민립보를 통한 혁명가의 길로 가게 되었다.
1918년 8월 15일 그는 20여 명의 동지들과 베이징대학 양창지 교수가 있는 베이징으로 가서 교수의 도움으로 베이징대학 도서관의 사서보조원 자리로 들어갔다.
그는 7개월 동안 베이징 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스승 양창지 교수의 병문안을 자주 가다가 교수의 딸인 양개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5.4운동(러시아혁명 3.1 운동)의 확산으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이 베이징 각 대학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6월 16일 전국 학생연합회가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그는 궐기에 주도하면서, “상강평론” 편집장을 하면서, “민중 대연합”이라는 글을 실어 명성을 얻었다.
스승인 양창지 교수가 1920년 1월 17일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스승의 딸과 결혼을 하여 침 수이 탕이란 연못 근처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세 아들을 낳았으며, 아내는 자식들을 양육하면서 생활하고, 그는 밖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20년 1월 그는 처음으로 노동자들로 정치조직을 만들면서, 마르크스와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으며, 그는 1922년 12월경에 후난성 노동운동이 최고로 오를 때에 가족들과 동참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투쟁에 두려움을 느낀 지주계급들은 후난성 지배자인 조항척에게 그를 제거해달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조항척의 긴급명령으로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 모든 사실은 알아버린 그는 광저우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왕징웨이와 연락하여 선전부장을 하였다.
1926년 그는 장개석이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북벌을 개시하자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갔다 가서, 1927년 1월 4일부터 그는 후난성 외 5개현의 농민조직과 정치상황을 조사하여 중앙위원회 제출하면서 농민정책을 추구하였다.
1927년 3월 26일 장개석이 무혈 진입하여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으면서, 공산당원이나 동지들을 학살하면서,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노동조합과 공산당원, 지식과 학생들의 조직, 농민조직을 해체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 조직이나 노동조합, 농민조직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극소수만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중국 전역에 혼란에 빠지고, 공산당의 적색테러와 국민당의 백색테러가 사회를 혼란시켰다.
1927년 8월 1일 장개석의 공격에 반격에 나선 공산당은 최초로 군대인 홍 군을 약 2만여 명을 조직하여 광저우에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는 창사로 돌아와서 후난성 공산당의 새로운 농민, 노동자 혁명군 조직을 만들면서, 대지주, 중. 소지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권력기반을 후난에 구축하는 소비에트 조직의 하나로서 목표를 세웠다.
그가 이끄는 홍 군 저항에 국민당 사령관이 가족들을 체포령을 내려 체포한 후 사형을 집행하자 그는 심리적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1827년 10월 그는 훈련도 안 된 홍 군이 패배하면서 이동하는 동안에 국민당의 민병대에 붙잡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산악지대인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후난성 농민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던 연유는 농민혁명군은 너무나 약체였던 것이었다.
1927년에서 1934년 대장정에 오르기까지 모택동은 징강산과 장사에서 새로운 전략의 혁명투쟁을 위한 정치적 사상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