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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마르크스(K. Marx)의 정치사상

마르크스(K. Marx)의 정치사상

목차

1. 생애

2. 사상적 특질

3. 유물사관

4. 계급투쟁

5. 정당론

6. 마르크스주의 비판

1. 생애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1818년 5월 5일 프러시아 라인 주 트리에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대인 변호사였으나, 사법의관이 되어, 1824년 신교로 개종을 하였다.

마르크스는 6세 때에 전 가족은 크리스트교도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기무 나지 움 고등중학을 마치고, 법학을 이수하기 위해 본 대학에 입학을 하였으나, 1년 뒤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법학 전공과 철학. 역사에 관한 연구에 몰두를 하였다.

그는 대학시절에 헤겔파의 이상주의자였으나, 차츰 무신론적인 혁명적 경향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대학을 졸업 한 후, 본 대학에 강사를 원했으나, 정부 정책에 실망하여 포기를 하고, 1841년 예나 대학에서 논문 “자연철학의 차이”로 학위를 받았다.

 

1842년 이후, 그는 좌파의 기관지인 라인 신문에 기교하여 논설이 인정받아서 초빙됨으로써, 편집기자로 임명되어, 신문의 주필로 승진까지 하게 되었다.

라인신문은 혁명적 민주주의 색채가 농후하다 하여 정부에서 삼중 검열까지 실시하여, 결국, 1843년 1월 1일 발행금지를 당했었다.

1843년 6월에, 그는 7년간을 약혼사이였던, 귀족의 딸인 웨스트팔렌과 결혼을 하여 11월에 파리로 옮겨갔다.

그는 파리에서 “독불년지”를 출판하여 모든 현 재물에 대한 비평을 함으로써, 무산대중에게 동정과 방위를 표방하는 혁명가적인 행동을 하였다.

그는 “독불년지”에서 헤겔법률철학의 비판과 유대인 문제를 논문에 실었으나, 출판비의 운영난을 격어면서, 1844년 말에 폐간을 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부인

1842년 11월부터 그는 엥겔스와의 교우가 시작되면서, 두 사람은 파리의 혁명가 단체에 드나들며, 최초의 공저 “신성가족”을 발표를 하였다.

그 후, 그는 엥겔스와의 두 사람은 40년간을 일심동체(一心同體)의 교우관계를 가졌으며, 파리에서 발행하는 일간신문 “파리스 포르베르츠”에 러시아 정부의 공격 논문을 기고하여 압박을 당하면서 결국 추방명령을 당하였다.

1845년 3월 그는 베르기에의 뷰류셀로 이주하여 엥겔스와 같은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

두 사람은 독일철학의 관념적 견해에 반대하는 공동발표로 독일 사회주의의 비판이라는 부재를 붙여 “도이체 이데올로기” 논문을 발표하였다.

1847년 말 부류셀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공산주의 동맹의 요구를 받아 “공산당 선언”을 써서, 1848년 2월 혁명 직전에 발표를 했었다.

그는 혁명이 일어나자 추방되어 3월 초에 파리로 갔다가 4월 초에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서 1년 동안 “신라인신문”의 주필을 했었다.

 

신문이 다시 정간이 되면서 추방을 당하여 파리로 망명을 했으나, 파리도 반혁명세력의 부활이 되었기에 다시 추방되어 런던으로 이주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신라인 신문”에 정치 경제 평론을 내면서, 많은 신문, 잡지에 시사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경제학 연구에 전념을 하면서, 유물변증법과 노동 가치설에 대한 체계를 수립하는 경제학 비판, 자본론을 공간(公刊)했었다.

1864년 런던에서 창립된 제1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에게 선언, 결의, 그 밖의 모든 문서의 집필을 위탁했었다.

그는 경제학의 개조, 자본론의 완성에 매진을 했으나, 만성기관지염으로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아내와 장녀의 사별로 큰 타격을 받아서, 1883년 3월 14일 사망을 하였다.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

2. 사상적 특질

마르크스주의는 철학분야에서 관념론을 억설이라고 배척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채택을 하였다.

이 주의는 존재가 사유를 규정하고, 자연이 정신을 규정한다고 보았으며, 세계사의 파악을 궁극적이거나 절대적인 존립을 부정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생성 유전의 흐름 속에서 파악을 하였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사회의 역사파악에 적용하여 유물사관의 정식을 확립하였다.

이 주의는 인간사회의 모든 발전 형태는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상응하는 생산제 관계를 기초로 하여 성립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데 두었으며, 경제 학설의 특징은 노동 가치설에 입각한, 모든 사회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해서와 고도의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계급투쟁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실현과 유물론을 강조하였다.

노동자 투쟁

3. 유물사관

유물사관은 인간사회의 역사에 적용되는 유물변증법이라고 하였으며, 유물사관은 생산 그리고 생산물의 교환이 모든 사회에서 생산물의 분배 및 이에 수반하는 사회의 계급적 또는 신분적 구성은 어떻게 생산되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바로 명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적 변경 및 정치적 혁명의 원인은 진리나 정의를 인간의 통찰 증진에 구할 것이 아니라 생산방법이나 교환 방법의 변동에서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은 자유임금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하고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적인 생산양식은 생산수단이 사회 공동 소유로 이행되어 생산자의 공동이용과 계획적 관리에 위임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물사관은 사회형태의 발전 기동력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와의 모순에서 구하므로 생산력이 발전단계에서 속박당할 때에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을 통하여 사회제도의 왜곡을 파괴하고 보다 높은 사회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유물사관은 혁명 일반의 학설과도 직결되는 역사관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4. 계급투쟁

공산당 선언에서는 종래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역사라고 했었다.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조합의 두목과 공장(工匠)처럼 억압자와 피억압자와의 대립으로 끊임없는 싸움은 전 사회의 혁명적 개조로 끝내거나 싸우는 계급의 공통적 몰락으로 끝난다고 했었다.

근대 시민사회는 두 개의 적대진영이 직접 대립하는 두 가지의 계급으로 분별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유물사관에 의한 계급투쟁이라고 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로부터 모든 자본을 억지로 빼앗아, 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생산도구를 집중시켜 생산력의 총량을 급속히 증대시킬 것이라고 했었다.

5. 정당론

마르크스는 정당의 본질을 계급투쟁의 조직으로 보고, 계급은 통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경제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생산에 있어서도 공통적 지위, 분배에 있어서도 공통적 지위에 의하여 결합된 집단으로, 공통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결합된 인류의 하나의 집단으로 의미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계급정당에 대립하는 특수한 정당을 형성하지 않으므로 공산주의 정당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직업요구

6. 마르크스주의 비판

1) 계급투쟁론 비판

계급투쟁론은 무자비한 계급투쟁으로서 일종의 선동 론으로서, 역사상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계급투쟁론은 중간계급의 존재를 너무 무시한 이론으로서, 사회 공동이익, 국민 이익을 등한시하였다.

 

2) 정당론 비판

정당은 계급 분류에 따라 성립되는 정치집단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민족적 이해는 계급적 이해보다 우선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계급정당론은 정당의 3차원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며, 계급의 현대적 개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당의 당원을 공모를 하지 않고 사고력, 판단력이 성숙하지 못한 청소년 당원 확대는 정당의 변질 가능성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사회경제이론 비판

자본주의 발전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양극화가 된다지만, 자본주의 발전은 중산계급의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 합의 조직화가 진전되면, 부르주아의 일방적인 착취가 없다지만, 협동조직은 국내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선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발달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선거권이 부여되어 노동자 계층의 지위향상과 정치활동을 할 수 있어, 의회주의 발전과 사회주의 정당의 발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유물사관 비판

유물사관의 주장은 역사적 순서가 마르크스 사후에도 현대까지 그 사관의 공식대로 실현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마르크스 사회주의 사상의 세력이 없으며, 자본주의 발달이 낮았던 러시아에서는 실천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중간 계급이 결여되고 있는 빈곤한 후진국가에는 마르크스주의는 위협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사관의 순서에 의하면, 자본주의 붕괴와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태아가 성장한다고 하는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체계의 실패는 서구에는 공업 실질임금이 상승하게 되고, 서구의 노동계급은 개량주의적 개선을 받아들이게 되고, 노동계급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조건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