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누구인가?
1. 일생
김홍도는 1745(영조 21)년에 태어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호는 단원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그는 29살에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정조)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관목관의 직책으로 사포서에서 근무를 했다.
그는 1781(정조5)년 정조의 어진 익성 관본을 그리며 동 참화사로 활약하며 찰방을 제수받았다.
1788년 김응한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의 명승지를 다니며 그림을 그려서 임금님에게 바쳤다.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 관본을 그렸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봉직하다가 퇴임 후에 사망을 했다.
2. 화풍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하여 신선과 같다고 했었다.
그는 산수, 도석 인물, 풍속, 화조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나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회사에 속한 일은 홍도에게 주라 고까지 했으며, 강세황으로부터 근대 면수, 금세의 신필이라고 찬사를 받았다.
그의 화풍은 50세 이전부터는 산수화인 서원 아집 유곡병은 화보에 의존한 궁극적인 정형 산수에 세필로 다루어진 북 종원 체적인 경향이었다.
그는 50세 이후는 한국적 정서에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를 그리면서, 단원 법으로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이었다.
그의 화풍은 탁월한 공간 구성,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붓 선의 강조와 부드럽고 조용한 담채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를 내는 한국적 정위를 풍기는 특유한 화풍이었다.
그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도식 인물화에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특히, 신선도를 그리면서, 굵고 힘차며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依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천진한 얼굴 모습 등 특징이 있었다.
후기에는 화폭의 규모가 작아지며 단아 하면서 분망 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었다.
그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에 관해 그리면서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양기, 신윤복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한국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대표작은 단월 풍속화첩, 금강 사군첩, 병진년 화첩, 다원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