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과정과 평가
1970년 유럽의 지배권을 갖기 위한 영토싸움을 300년 이상 하여 왔던 두 강대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 왕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완전한 프랑스인이 되기 위하여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은 물론 하인과 반려 견까지 버리고 오스트리아 공주에서 프랑스 왕세자비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날 갑자기 불이 나서 인명사고가 나서 132명의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들의 오랜 적국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증오가 신부에 대하여 가짜 소문이 펴져나가면서 신부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결혼하여 7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자 모든 책임을 국민들은 신부에게 돌리게 되자 그녀는 임신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었다.
심지어 가짜 뉴스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성적 만족을 하지 못하여 동생 연애를 한다느니, 시동상과 근치 상간을 한다는 사실과 무관한 소문이 프랑스에 전역에 펴졌다.
이런 연유로 그녀에게는 적자 부인, 사치의 여왕이라는 불리듯이 장신구와 옷들은 호화로움과 헤어스타일을 화려하게 하여 수많은 가짜 뉴스가 따라다녔다.
특히, 그녀에 대한 이미지 좋지 않았던 연유는 매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티를 벌이던 귀족과 달리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직전에 왔으며, 더욱이 최악의 자연재해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운데 나라에서는 별의별 세금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어 들었다.
결국, 귀족의 사치, 최악의 자연재해, 가혹한 세금제도, 미국의 독립 지원까지 이 모든 것이 나라의 재정이 파탄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에는 왕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가진 절대 왕정의 시대로 국민이 성직자와 귀족이 내지 않는 세금을 내게 되자 부당성을 주장하여 국민의회(국회)를 만들자고 주장을 하였다.
1789년 6 울 20일 국민들은 테니스코트 장에 모여서 역사적인 선언을 “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며, 대표를 쫓아 낸다 할지라도 국회가 필요하므로 모일 것이다,”하였다.
이것이 프랑스혁명을 촉발시킨 테니스 코트 선언이었다.
프랑스의 혁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무절제한 쾌락을 즐기며 왕을 타락하게 만들었으며, 물가의 폭등으로 인한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이 원인이 되면서, 1789년 10월 5일 경제적 궁핍에 분노한 여성들이 막대기와 돌멩이, 도끼 등을 들고 파리 시청으로 몰려가서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치며 행진을 하였다.
이들은 시청광장에서 모인 분노에 가득 찬 시민들은 베르사유 궁전까지 가서 근위병을 살해하면서 왕비의 침실까지 쳐들어갔다.
권력을 잃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국민들의 감시 하에 죽음의 공포 속에 살면서, 왕과 왕비는 탈출을 하기 위하여 1791년 6월 20일 밤 자유를 향해 가족들과 파리에서 떨어진 몽 메디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왕당파의 군대와 용병대가 루이 16세를 기다리며 혁명군을 진압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도피 도중에 마을 우체국장이 지폐에 새겨진 루이 16세를 알아보고 국민의회에 신고하여 왕과 왕비, 그의 가족을 체포하여 다시 파리로 압송 도어 탕플 탑에 투옥되었다.
루이 16세는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1793년 1월 21일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자, 많은 민중들은 단두대로 몰려들어 손수건에 피를 적셨다.
그 후, 1793년 10월 16일 약 9개월 만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카락이 없이 잘린 모습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그녀의 죄명은 적과 내통하여 프랑스를 전복하려는 반역행위와 재정낭비로 정부를 부패한 죄, 백성의 기만하여 왕을 타락한 죄, 근친상간 죄 등 혐의까지 씌웠다.
결국, 프랑스혁명은 봉건제도의 몰락과 시민계급의 광장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의 신호탄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에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과 계몽주의 사상이 펴지면서 시민계급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프랑스혁명은 다른 혁명과 달리 인간 중심의 인권으로서, 인간은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을 위한 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의 혁명군이 썼던 모자 색깔은 프랑스의 국기 색깔로서, 파리를 상징한다는 파란색과 빨간색에 부르봉 왕실의 상징색인 하얀색을 더한 것이며, 혁명 구호였던 자유, 평화, 박애, 이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파란색은 자유, 흰색은 평등, 빨간색은 박애를 뜻하며, 프랑스의 삼색기는 아일랜드, 이탈리아, 루마니아 등 유럽과 아프리카 등 다양한 나라의 국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여성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이룬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