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Putin)의 정치적 리더십
러시아(Russia)는 1917년 2월 혁명 후, 1924년까지 소비에트 사회주의인 연방 공화국이었다.
1990년 2월 구소련 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를 꾀하며”라는 정치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일당독재에서 복수정당제도가 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구소련 공산당 서기 고르바초프가 되었다.
1991년 연방정부의 기능 불능 상태에서 독립국가연합(CIS) 결성 합의를 함으로써, 구소련은 정말 해체되어, 1992년 1월 1일에 러시아를 비롯한 11개 공화국은 완전 독립국가가 되었다.
푸틴은 1952년 10월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의 노동자의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에 첩보영화 “창과 방패”를 관람한 후에 첩보원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1975년 KGB의 첩보원으로 제의를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학대학을 졸업하고 KGB요원 훈련학교를 마치고 방범 조사원으로 일을 했다.
그 후, KGB해외 정보국 요원으로 동독에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권력의 허무함을 느꼈다.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노선의 동참 요청을 거부하고, 1991년 개혁주도 세력의 경제 민영화를 추진한 추바이스 전 제1부 총리와 함께 일을 했다.
1991년 소련 공산당 보수파 중심이 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의 반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쿠데타는 2일 만에 실패하자, 옐친을 지지한 개혁파의 기수인 솝차크의 체포 명령이 떨어졌으나, 푸틴은 솝차크의 구조대를 구성하여 풀코보 공항에서 KGB요원보다 앞서 그를 구조했다.
훗날, 솝차크는 푸틴을 보고 정열과 충성 그리고 노력가라는 칭찬을 했다.
1994년에서 2년간을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을 지내면서 수많은 인재를 만난 것이 훗날 자신의 정치적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1999년 국가안보회의 서기를 겸하다가 총리를 했으며, 옐친 대통령에 의하여 대통령 권한 대행을 했다.
푸틴은 2000년 5월에 제3대 대통령, 2004년 제4대 대통령, 2008년 제10대 총리, 2012년 제6대 대통령, 2018년 제7대 대통령이 되면서, 푸틴은 2024년까지 임기가 보장되는 대통령이 되었다.
푸틴은 권위주의 독재체제로서 장기집권을 통한 대외노선을 강화하는 평창 주의로서 집권의 욕망을 영위하는 리더십을 펼치면서, 끝없는 정치적 욕망의 리더십은 전체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정치지도자의 모습이다.
2004년 9월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한 학교에서 체첸 반군이 들이닥쳐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저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푸틴은 즉각 전차와 공격헬기를 동원하여 아이들 인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강압 진압하여 수백 명이 인명피해를 냈다.
푸틴은 전체주의 독재국가의 잔인한 지도자로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적인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독재자의 끝없는 정치적 욕망은 국제사회의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푸틴의 정치적 욕망의 리더십으로 인하여 국민의 마음이 불신으로 돌아서자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하여 희생의 양(scapegoats)을 찾아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러 했다.
그때, 러시아의 최신형 오스카 급 전략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 해에서 훈련 도중 원인불명의 폭발로 해저 108미터에 침몰되었다.
푸틴은 휴가에서 모스크바에 즉시 귀환하지 않고, 보안의 이유로 서방측의 구조지원을 거절하여 118명의 군인을 전사시켰다.
푸틴은 국민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희생의 양으로 삼았으나 결국, 푸틴의 지지도는 50%까지 하락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푸틴의 끝없는 정치권력의 욕망은 국민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괴멸(destruction)시켰다.
이러한 정치상황에서도 푸틴의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은 마치, 한 마리의 독수리가 주둥이를 쪼아 털을 뽑아 다시 돋아나기 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높고 넓은 창공을 향해 비상하듯이, 임기가 2024녀까지 보장된 장기 집권을 통하여 정치적 욕망의 리더십을 펼치고 있다.
푸틴은 강한 러시아 제국의 재건으로 표트르(Pyort) 대제(러시아의 황제)의 꿈을 꾸는 강력한 정치적 욕망의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