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정치적 리더십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1928년 장개석과 손문은 소련과 단교하여 국민당의 국민정부를 세웠다.
1949년 일본의 침공으로 공산당과 합작하여 일본을 물리쳤으나 국공내전으로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도피하여 정부를 세우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창설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실권을 잡아 개혁과 개발 노선의 정책을 추구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장쩌민이 주석이 되었으나, 2005년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총리 체제가 되었다.
2007년 제17차 당 대회 시에 태자당의 일원인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정치적 후계자인 리거창을 제치고 상무위원 9명 중에 6위로 다크호스처럼 급부상했다.
시진핑은 2010년 중국 부주석과 공산당 중앙조사 위원회 부주석에 오르고, 2012년 중국 국가 주석과 당 총서기가 되었다.
2013년 중국 혁명 제1세대의 마오쩌둥과 개혁과 개발정책을 추진한 덩샤오핑, 혁명 후세 데인 장쩌민과 후진타오에 이어 중국의 13억이 넘는 인구의 정치지도자로서 시진핑 시대가 되었다.
시진핑의 정치적 리더십은 국가권력을 이용한 카리스마적 야망을 가진 지도자이다.
중국 공산당 정치지도자인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며, 과거를 이용한 권모술수의 리더십이었다.
그 후 덩샤오핑은“흑 묘 백 묘) 론으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 좋다는 실천과 실질을 추구하는 실용주의 리더십이었다.
반면에 시진핑은 자신의 정치권력의 목적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견디며 기다리다가 기회가 왔다면, 정치적 타이밍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기회주의자이며, 미래의 야망을 지닌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시진핑은 미래의 창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회가 오지 않으면 물러서 있다가 기회가 왔다면 과감히 행동을 하는 지도자이다.
시진핑의 성장과정을 보면, 부친은 혁명투사인 시중쉰으로서, 공산당 개국공신이며, 마오쩌둥은 제갈량보다 지략이 뛰어났다고 높이 평가를 했다.
시중쉰은 리젠퉁이 집필한 소설 류즈단 사건에 연류가 되어 옥중에서 죽었으며, 그는 평상시에 시진핑에게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고 화합과 단결로 합쳐야 한다는 미래의 정치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교육시켰다.
시진핑 14세 때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집은 몰수당하고 가정의 어려움이 당해 반동의 자식이라는 죄목 아래서도 시진핑은 기회가 올 때까지 쥐 죽은 듯이 지냈다.
시진핑은 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하여 신청서를 냈으나 부패분자의 자식이란 이유로 입당 허가가 나지도 않아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신청하여 11번째 허가를 받는 끈질긴 집념을 가졌다.
시진핑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가정과 자신의 미래를 바꾸겠다는 꿈을 가지고 언제나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신경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간직한 100번 넘게 기운 담요를 향상 옆에 두면서 바라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외형적으로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비취는 시진핑은 내적으로는 절대로 자신의 정치권력 세력이 미래를 창조하고 지배할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우직하게 견디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결국, 중국의 세계 제1위의 인구를 가진 국가의 카리스마적인 야망을 가진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외형적으로는 큰 체구와 온화한 미소를 지니고 소탈한 성격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야망을 알 수 없는 지도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