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1. 생애
마거릿 대처는 1925년 링컨셔주 그랜섬에서 식료품 집 둘째 딸로 태어나서, 1947년 옥스퍼드 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29세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1959년 보수당으로 영국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970년~1974년 교육부 장관과 과학부 장관을 했다.
1975년 영국 최초 보수당 여성 당수가 되었으며, 1979년~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11년 7개월 최장수 총리를 했으며, 2013년에 사망을 했다.
2. 정치철학을 정책에 적용
1978년 보수당은 노동당이 노동하지 않는다는 광고 캠페인을 벌였던 것은, 실업자 수가 150만까지 치솟았다.
산업 및 전력 파업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주의 정책의 폭로 상황은 보수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대처는 노조 영향력에 반대하는 해결책을 강화해 나갔으며, 서비스업의 파업을 제한 하면서, 노동조합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없애는 정책을 개발했다.
대처는 사회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충성도를 내려놓게 만들겠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껴서 노조를 개혁하고 임대주택 구입 계획을 도입했으며, 소득세를 줄이고, 임금과 가격, 배당금을 통하지 않기로 하고 여러 계획규제를 없앴다.
또한 외환 시장을 관리하고 해외에서 영국에 투자하도록 장려했으며, 정부는 공공분야의 규모를 줄여나갔다.
대처 내각의 전후에 세금과 지출이라는 경제적 통설에 집착하는 좌편향 보수자들이 많아 성공적으로 개각을 단행했다.
자유시장 접근법으로 정부의 중단기 재정 전략으로 통화량을 제한하고 정부의 차입금을 깎아서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 목표를 세웠다.
산업정책에서는 민간 부문이 되어야 할 산업에서는 정부가 발을 빼고 민영화 프로그램인 브리티시 텔레콤, 브리티시 에어웨이, 브리티시 스틸, 브리티시 레일랜드, 브리티시 가스 등을 혁명적으로 실시했다.
대처의 민영화 프로그램은 많은 영국인을 주주로 만들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정책으로 반영되었다.
시티 오브 런던에서 실시한 “빅뱅” 개혁 덕에 런던은 금융중심지가 되어 전 세계 자금을 끌어들이고 수천 명을 고용할 수 있었다.
외교정책에서도 공산주의를 비난하고 자유를 촉진하는 태도는 시기적으로 미국의 레이건보다 앞섰다.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유럽경제 집단이 되어야 하며, 민족국가는 민족 자결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관점은 선견지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