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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이차돈 불교 순교자에 관하여!

이차돈

이차돈 불교 순교자에 관하여!

 

이차돈은 506(지증왕 7)~527(법흥왕 14)의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로서, 성은 박 씨,, 이름은 염촉,, 거차돈이며, 아버지는 미상이며,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 감문왕의 후예라고 한다.

이차돈은 어려서부터 성질이 곧아 사람들에게 신망받았으며,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신라에서는 국법으로 허용되지 않아 한탄했다.

그 당시 법흥왕도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력에 의하여 국운의 번영을 꾀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할 수 없었다.

 

이 떼 이차돈은 법흥왕의 뜻을 헤아려 왕에게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대절이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짓 전명(傳命)한 죄를 내려서 자신 머리를 베면 만인이 굴복하며, 교명을 여기지 못한다고 했으나, 법흥왕은 반대했다.

이차돈은 모든 것, 중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신명이지만,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불교)가 행해지면 불일(부처)이 중천에 오르고 성주가 길이 편안할 것이라고 하며, 왕의 허락을 청했다.

 

이 무렵 천경림이 절을 짓기 시작하자 이차돈은 왕명을 받들어 불사를 시작한다는 소문을 내자 조신들이 크게 흥분하자 왕은 자신이 왕명을 내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차돈은 왕 앞에 불사를 일으켰음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한 일이며, 불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하고 경제가 유익하므로 국력을 어긴 들 무슨 죄가 되겠느냐 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커지게 되자 왕은 하리(下吏)를 불러 이차돈의 목을 베도록 했다.

 

이차돈은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력이 일어날 것이라하고,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잘린 목에서 흰 젖이 수십 장이나 솟아올랐다고 하였으며, 왕과 군신들은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이차돈은 그때 26살이며, 수년 후 법흥왕 21년에 천경 됨에는 신라 최초의 정사(精舍)가 세워졌으며, 절이 완공되자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승려가 되어 법공(法空)이라고 불렸다.

 

이 절을 사람들은 대왕 흥륜사라고 했으며, 이차동 순교 뒤에 해마다 기일에는 많은 사람이 흥륜사에서 추모했다.

그 후, 이차돈을 위해 자추사를 세워서, 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영화를 얻고 불도를 행하며 법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상징하는 육면 석당이 현재 경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시 석당은 그의 죽음을 영원히 공양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이차돈 순교비는 경북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의 백률사지에 기념하기 위해 법흥왕 14년에 건립되었으며, 이차돈을 공양당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