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Churchill)의 정치적 리더십
목차
1. 생애
2. 정치적 리더십
1. 생애
처칠(Churchill)은 1874년 11월 30일에 옥스퍼드셔 블렌 하임에서 출생하여 1882년 세인트 조지 입학, 1884년 브런즈윅 학교에 입학하였다.
1887년 해로학교 입학, 1893년 샌드 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입학, 1894년 제4 왕립 경기병 연대에 입대를 하였다.
1898년 “말라칸드 야전군 이야기”를 첫 출간하였으며, 1899년 올덤 선거구에 보수당후보로 보권선거로 출마했어나 낙선을 하였다.
그는 1900년 올덤 선거구에서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04년 토리당에서 자유당으로 이적을 하였다.
1905년 그는 식민지 차관에 임명되었으며, 1908년 통상장관이 되었으며, 클레먼타인 호지어와 결혼을 하였다.
1910년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고, 1911년에 해군장관으로 임명되어, 1913년 영국군 항공대를 창설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안트베르펜 방어에 지휘를 했으며, 1915년 다르다넬스 전투에 참전을 했으며, 해군장관에서 축출되어 랭커스터 공작령 대법관으로 좌천이 되었다.
1917년 군수장관으로 정부에 복귀하여, 1919년 육군과 공군의 수장인 전쟁장관에 임명이 되었다.
1921년 식민장관에 임명되어 식민성 중동 부서를 창설했으며, 1922년 던 지 선거구에서 낙선하여, 1924년 다시 토리당으로 이적을 하면서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32년 정치 야인생활을 하다가 1939년 해군장관으로 재임되었다.
1940년 5월10일 총리로 임명되면서,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그는 내각을 설득하여 계속 싸우자고 하였다.
1941년 대서양 헌장에 서명하면서,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을 하자 미국의 전쟁에 참전을 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하자 퀘벡 회담에 참석하였으며, 1945년 알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였다.
그는 보수당이 총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1946년 미주리 주 풀턴에서 실시한 평화의 연설에서 “철의 장막”을 언급하였다.
1951년 토리당이 총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총리로 복귀를 하면서, 1953년 10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55년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1963년 존F 케네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최초의 미국 시민으로서 임명을 받았다.
1964년 우드포드 하원의원직을 사임하고, 1965년 1월 24일에 지병으로 사망을 하였다.
2. 정치적 리더십
윈스턴 처칠은 20세기 영국에서 위대한 정치인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이끈 전쟁영웅이었으며, 노벨문학상을 탄 명문작가이었다.
오늘날은 정치인이라면, 문학과 예술에 아름다운 지적능력의 소유자라야 만 탁월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의 폭넓은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통찰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위대한 정치적 리더십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유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와 한 번 결정한 것에 대한 강한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치적 생명과 신뢰성을 지키기 위하여 의회를 설득하여 나치에 대항하여 싸우자는 명분은 자신을 위한다는 것보다 영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군인으로서, 오랜 투쟁을 경험했으며, 많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는 세속적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인 용기와 행동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는 문학작품을 하루 종일 글을 쓰지 않고, 구술하는 방법으로 생각을 모으고 있는 동안에 담배와 알코올을 섞고, 연보라색 벨벳 작업복을 입고 자신 이름의 첫 글자를 새긴 슬리퍼를 끌고 마룻바닥을 서성이면서, 깊이 연구하여 고심 끝에 만들어 낸 문장을 큰소리로 뱉어 냈다.
그는 밤중에도 술을 홀짝 들이켜고 불 붙이지 않은 시가를 씹으며 구술을 멈추지 않고 산문을 뱉어내면, 타자수는 자판을 두드리며 말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쉬는 시간 없이 브랜디를 마시고 시가를 피우면서, 쓴 작품이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찰스 디킨스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하였다.
그는 세계 지도자들이 중동과 러시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러시아를 향해 “철의 장막”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여 그를 세계적인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는 영국을 대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자질 덕분이었으며, 다른 어느 정치인보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이면서, 변화무쌍한 정치적 리더십의 정체성을 나타내면서, 정당정치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었다.
그가 좌파와 우파 양쪽에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근거는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활동을 한, 정치가이자 사회개혁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회개혁가로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저임금 근로자 중에 여성근로자를 돕기 위해 임금위원회 법안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민이 격심하게 노동한 대가로 생활임금 수준 이하로 받는 것은 국가의 죄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연유는 단순히 제국이나 경제를 위하거나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정이 많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며, 처칠 또한 영국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따라서 처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