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Napoleon)의 정치적 리더십
목차
1. 생애
2. 정치적 리더십
1. 생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코르시카 섬인 아작시오에서 아버지 카를로 보나파르트와 어머니 러티 치아 라 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79년 그는 9살에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학을 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1784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며, 졸업한 후, 포병소위로 임관하였으며, 그는 프랑스혁명 후, 평등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1793년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에 대한 진압을 한 후에는 대위에서 준장으로 26살에 승진할 수 있는 탁월한 군사적 능력이 있었다.
그는 1795년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을 제1통령으로 지명을 했으며, “브뤼메르 18일”로 알려진 쿠데타는 많은 비판을 받던 총재정부를 종말을 시켰다.
그는 능력과 헌신이 부족해도 가족들을 핵심자리에 임명했으며, 1796년 사교계의 조세핀과 결혼을 했으며,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되어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도록 만들었다.
제1 통령이 된 그는 유럽에 다른 군주들에게 자신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키고 제도화를 하였다.
1799년 그는 시리아의 침공과 이집트 근처의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아부키르만의 승리로 더욱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 통령으로 임명이 되었으며, 그는 행정가로서 뛰어난 실력으로 만든 “나폴레옹 법전”은 오늘날 프랑스의 민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802년 8월 헌법을 고쳐서 종신 대통령이 되었으며, 1804년 프랑스 국민의 300만 명이 넘는 지지를 받으며, 투표로서 30대의 초반에 황제의 왕관을 썼다.
1805년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군을 물리치면서, 전 유럽을 진압하여 세력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07년 말 그는 포르투갈을 정복하고, 스페인을 조제프를 스페인 왕으로 뭐라를 나폴리 왕으로 지명을 하였다.
1809년 조세핀과의 갈등으로 이혼을 하고 몇 달 후,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을 하여, 1811년 3월 “로마 왕”이라 불리는 루이 나폴레옹 아들을 낳았다.
1812년 6월 그는 러시아를 침략하여 모스코바를 점령하기 위하여 진입을 하였으나 이미 모스크바는 불타버린 상태에서 무서운 추위에 후퇴하면서 많은 병사를 잃게 되었다.
프랑스 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1812년 12월 적은 군대만 겨우 데리고 파리로 돌아 왔으나,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한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이 1814년에 파리를 점령하고, 그를 이탈리아 엘바 섬으로 유배를 시켰다.
그 후. 부르봉 왕족인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위를 복귀하고, 가장 먼저 반기를 들었던 그의 장인 오스트리아 황제는 황녀인 부인과 아들을 비엔나로 대피시켰다.
1815년 3월 그는 엘바 섬을 탈출하여 1천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파리에 들어와서 다시 황제가 되어, 새 헌법을 반포하는 등 정치적인 복귀를 하려고 하였으나,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 패하여 두 번째 퇴위를 하면서, 처음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사람이 살기도 적합하지 않은 세인트 헬레나 선으로 보내졌다.
1821년 5월 5일 그는 프랑스 황제 자리를 아들이 세습받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으나,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골을 파리 센 강변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까지 프랑스의 3대 영웅으로는 알렉산드로스, 카이사와 함께 나폴레옹이 추앙을 받고 있다.
2. 정치적 리더십
나폴레옹(Napoleon)은 자신의 존재만을 믿고, 카리스마, 정력, 실용주의 정신으로 군사적 야망과 정치적 야망을 이룬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중적 인기로 국민투표를 통해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다시 황제가 된 영광스러운 정치 지도자가 된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무엇인가?
그의 강력한 권력의 리더십은 자신의 후견제도와 보상 제도를 만들어 지지자들의 충성심을 키우면서, 반대파들에게는 공포감 조성과 모략 등으로 보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리더십의 강점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하여는 무엇이던지 탁월한 능력으로 카리스마적, 대범과 모험심, 자신감, 투지와 열정, 선경지명 등 계획을 세우고 조직적으로 뛰어나 기술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독재자로서의 권력을 독점한 후, 지나친 통제와 모략 등으로 무조건 충성과 지지를 요구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합법화시켰다.
그는 이탈리아를 점령하기 위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는 전투에서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한 요인은, 군사적 전문성과 지형학에 정통하였으며, 현실적으로 화려한 형식적인 전술보다 군사들의 음식과 의류 같은 기본적 문제를 충족시키는 것이었으며, 부정적인 사고력보다 긍정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리더십이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지도력은 이 험악한 눈 산을 넘어가면, 우리에게 명예와 영광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연설을 하여 병사들을 감화시켜 이탈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뒤에서 침묵하거나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치권력을 탐닉하면서, 강압적이고 독재적인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통치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과 혁명 후, 프랑스의 이상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면서, 자신의 의사전달은 상의하달 식 방법만이 혁명의 성과를 계승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력이 강해지자 자아도취에 빠져서 러시아 침공 시에 50만 명의 군사들을 눈보라 속에서 죽게 만든 전투가 그의 최후의 몰락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남긴 유명한 명언 중에서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1813년 Lemarois 장군에게 쓴 편지의 일부라고 한다.
과연, 그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불가능은 없다는 말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1%의 성공 가능성을 향해 꿈과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