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리더 십
1. 정치적 리더 십(Leadership)의 원칙
리더 십(leadership)은 모든 사람의 책무이므로, 거창하고 원대한 것도 아니며, 일상에서 스스로 원하는 유형의 리더(leader)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또한 소수만이 갖는 신비로운 자질이 아니며, 그렇다고 미리 정해지거나 유전자나 특수한 형질도 아니다.
리더 십은 관찰할 수 있는 원칙과 행동의 패턴이며, 정의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의 패턴으로서의 집합체이다. 여기에는 동기나 욕구가 주어지고 적정선의 연습과 피드백, 코칭을 받는다면, 리더 십 기술을 배울 수 있고 강화되며 이를 연마함으로써, 향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배움에 열정을 가져야 하며, 리더는 인간적인 사람으로서 겸손할 수 있는 용기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이러한 리더십의 도구는 자신이며 리더 십 기술을 정복하는 것은 자신을 정복하는 것에서 나오므로 자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리더 십 개발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잠자는 리더의 자질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지금 디지털 혁명 시대에서 더욱 훌륭한 리더가 되는 것은 각 구성원이 생각하는 가치와 경험, 추구 사항을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리더십의 모범적인 원칙을 언급하면, 첫째, 가치와 원칙(model the way)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자신의 원칙을 분명히 하여 자기 목소리를 찾아야 하며, 경험을 최고의 리더 십으로 가능성 있는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어려움을 헤치고 새로움에 도전하여 외부의 시야를 넓히며, 모험을 강행하는 혁신과 변화를 해야 하며, 시행착오와 위험을 감수하고 창조적인 성공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팀 구성원들 간의 공고한 신뢰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협동 의식과 구성원의 자기 결정권을 높여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
리더 십은 리더와 추종자 사이의 관계이므로 리더는 정직한(honest), 유능한(competent), 영감을 주는(inspiring) 미래지향적(for ward-looking)이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둘째, 리더 십은 비전으로 가슴이 뛰게 해야 한다.(Inspire a shared vision)
리더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조직의 미래를 발견하기 위해 타인의 말을 깊게 경청하거나 홀로 몰입하여 미래를 예견하며, 공통된 목적을 발견하여 미리 비전을 설계하는 열정을 표현하여야 한다.
셋째, 리더 십은 새로움에 도전해야 한다.(challenge the process)
리더는 주도적으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통찰력을 발휘한다. 이는 익숙한 환경의 경계를 넘어 혁신적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부의 통찰력에 의존하여야 한다.
이는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강한 저항을 무릅쓰고 조직과 구성원을 움직여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한다.
리더는 사물의 내재적 속성을 인식하는 능력인 내부 통찰력과 외부 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외부 통찰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그리고 실험과 위험을 감수하여 작은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강인성, 경험을 통해 배우고 적극적으로 학습하여야 한다.
넷째, 스스로 행동하게 만들어야 한다.(enable others to act)
리더와 구성원 간에 상호 신뢰를 형성하고 관계를 촉진시켜 협력하게 만들면서, 구성원의 자기 결정력을 높이고 구성원의 역량을 강화시켜 신뢰 분위기를 조성시켜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역량과 자신감을 길러주어 책임감을 느끼게 하여야 한다. 또한, 리더와 구성원 간의 정보를 공유하고 교육하는 업무를 체계적으로 정비할 수 있는 자신감을 길러주어야 한다.
다섯째, 열정이 우러나게 해야 한다.(encourage the heart)
리더는 구성원 각자의 훌륭함을 인정하고 가치를 공유하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반면, 목표와 기준을 명확히 하여 비전과 가치에 몰입하기 위해 개인이 하는 일을 인정하고 보상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 즉, 가치실현과 성취를 공개와 공식적인 축하를 함으로써, 구성원들은 공동체 의식을 갖고 창조하는 열정이 우러나게 된다.
결국, 리더 십은 리더와 구성원들 간의 새로운 일을 실천하며, 거기에서 얻는 교훈을 실생활에서 적용하여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성과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리더 십의 성공 비결은 리더와 구성원들 간의 상호 간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하는 일은 더욱 사랑하게 되어 매일 새로운 일을 실천하게 된다.
2. 정치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에 관한 리더 십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到來)는 최첨단 지식정보화로 인한 기술혁신과 문화 문명의 변화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미래 시대의 급변한 변화와 불확실성 시대의 정치 지도자는 새로운 혁신과 창조가 지속되는 정치 환경변화와 발전에 관한 판단과 결정의 리더십 능력이 필요하게 된다.
과거에는 농업, 산업화 시대의 정치 지도자는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정치 지도자였지만, 지식정보화시대에는 특수한 전문지식을 가진 감성적인 지도자로의 리더 십으로서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하여 정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국민이 생각하고 원하는 정치 지도자의 리더 십은 합리적이고 탁월한 생각의 틀을 가진 통찰과 직관으로 정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판단과 결정의 리더 십이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에 관한 리더 십 패턴(pattern)은 원칙에 관한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기술을 강화하여야 한다.
정치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에 관한 리더 십은 가치와 원칙(model the way)을 명확히 하여,정직(honest),유능(competence),영감(inspiring), 미래지향적(for ward-looking)리더 십이어야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정치 지도자는 국가의 정책이 국민으로 하여금 비전과 희망을 주어 감동으로 가슴이 뛰게 하는 리더 십이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변화와 혁신으로 사물의 내재적 속성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내부 통찰력과 외부 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외부 통찰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환경변화를 일으키는 리더 십이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국민이 인정하고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믿음을 주는 리더 십으로,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일에 대하여 남을 탓하거나 아랫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인정하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당초에 정치적 동기와 욕구에서 판단으로 결정한 말과 행동이 정치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곤경에 처할 때는 시행착오로 인한 비난과 위협을 감수하드라도 자신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쳐 진솔하게 사과하여 책무를 다하는 리더 십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정치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에 관한 리더십은 국민에게 신뢰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국민의 철저한 지지나 협동 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정치 지도자의 결정권을 높이게 되는 역량을 강하시키게 된다.
흔히,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판단가 결정에 대하여 만족함으로써, 자기만이 쉽게 빠져 나간다는 생각으로, 국민의 올바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주변의 아첨만 듣고 행동하게 된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 시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가 어렵게 된다.
정치 지도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할러면, 진실을 듣더라도 결코, 화내지 않으며, 달콤하게 말하는 아첨꾼보다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가까이 선임하여 어떠한 사실이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을 허용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주위엔 참된 조언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현명한 정치 지도자라면, 진실과 허구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결정한 말과 행동에 대해 최종적으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주위엔 언제나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다지만, 언제나 이들은 권모술수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비난과 욕설로 무너뜨리게 하므로 정치 지도자는 언제나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다.
정치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튼튼한 제방을 쌓는 것처럼 정치적 토대를 쌓기 위해서는 항상 현명한 판단과 결정으로 목표를 확고히 추구하는 정치 지도자의 리더 십이 있어야 한다.
특히, 정치 지도자로서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한 행동은 국민으로부터 언제나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부정한 부패 자금으로 부를 축적 한다거나 부정한 행동으로 불륜을 하는 것은, 한평생 공들어 돌탑 쌓듯이 한 명예는 한순간 무너진다는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 정치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에 관한 리더 십은 정통성과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간사한 지혜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권력으로 독자적인 법을 만든다거나 권력을 행사한다면, 국가 권력의 방향이 정반대로 다를 경우에는 자신의 정치권력의 허구성으로 인하여 괴멸되고 말 것이다.
결국, 정치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에 관한 리더 십은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한 탐욕으로 유례없는 사악한 악법을 만든다면, 국민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 시에 표로 심판을 받게 된다.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의 호의(favore)를 받을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 사회현상에 대한 지혜로운 판단과 결정을 하는 리더 십을 발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도래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올바른 정치 지도자로서의 참모습이 될 것이다.
3. 정치 지도자의 책임과 리더 십
국민 빈곤층의 책임은 국가의 책임이 우서이며, 이를 방관한 정치인의 리더 십의 부재로 인한 정치적 책임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빈곤층은 사회생활에서 직장이 없는 실업자나 노숙자를 포함한 경제적 취약한 빈곤층을 말한다.
이러한 빈곤층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고, 파괴적 행동으로 정상적인 괴도에서 일탈적인 행동을 하면서, 마냥 국가나 사회의 지원을 기대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빈곤에 대한 책임은 정치적 지도자들의 무능으로 인한 정책효과를 가져오지 못한 지도자의 리더 십의 부재에서 기인된다고 본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경제적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나 구조적 원이도 있지만, 이를 위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의 리더 십 문제로 귀속되며, 빈곤에 대한 구조적 환경과 개인적 책임이 상호 간의 작용이 배타적일 수 있다.
법적 책임에 있어도 조건과 요인에서 개인만은 면책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개인적 요소인 욕망, 인식, 동기, 행동 등 사회 환경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적인 제재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회제도가 빈곤층에 대한 삶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보장제도가 부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보장되어 존재하느냐는 정치 지도자들의 정책적 판단과 정치를 책임지는 리더 십이 존재하느냐에 달려있다.
예를 들면, 노동자들의 복지, 공교육, 사회적 법적인 지원제도 등이 광범위하게 평등하지 못하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빈곤층에 대한 무책임할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회 환경을 조성하지 못하는 데에 있어 정치적 지도자의 리더 십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특권이 많은 부유층의 무책임한 일탈행동에 대하여 평등주의에 의한 정치적 책임을 지는 리더 십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소수의 경제적 특권층은 빈곤층에 대한 멸시와 확대, 조직적인 불법적 행동, 다양한 방법의 탈세, 불법 투기 등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적 지도자는 그냥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빈곤층은 상대적으로 최소한의 사회제도나 과정에서 고통이나 불이익으로 부당하다는 판단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경우는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며, 책임을 져야하는 정치 지도자의 리더 십을 불신하게 된다.
물론, 정치 지도자의 리더 십의 책임 문제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우선, 도덕적이고 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관한 지도자의 리더 십의 책임 문제에 있어서는, 전자에 대한 비난과 죄를 추궁할 수 있지만, 정치적인 책임은 정치공동체 속한 질서의 문제로서 정치 지도자로서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빈곤층과 특권층에 국한된 문제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는 한 소속 내의 책임지는 지도자의 모습은 없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정치 논쟁으로 국민을 실망을 시키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욱이 각종 언론인 T.V 방송이나 신문들은 국가의 정치적 중대 사항이 너무나 많아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논쟁에 대한 보도뿐이므로 국민은 방송과 신문을 외면하고 언론에 대한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불신하여 듣지도 보지도 않은 시대가 되었다.
더욱이 언론의 침잠성에 관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국민이 알고 싶은 뉴스는 보도하지 않고 국민 생활에 관심이 없는 보도로 일관함으로써, 국민은 정치인의 불신과 더불어 언론의 보도를 믿지 않는 풍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생각하고 바라는 정치에 대하여 진정 국민을 생각하고 위하는 정치 지도자로서 책임지는 리더 십이 시대적 희구(希求)사항이다.
4. 일하는 정치조직의 리더 십(Leadership)
인간은 태어나 반평생을 먹고 살기 위해,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정치조직에서나 개인사업 등 모든 직종에서 직업이라는 개념으로 일을 하게 된다.
누구나 일하는 직업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일을 한다면, 지루함, 좌절감,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직업에서 역량을 갖추고 직무에 헌신하게 되면, 일하는 보람을 느껴 장기적인 성공을 가늠하는 선행지표가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조직 생활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개인적인 불안감으로 인하여, 일과 삶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고, 개인의 가치관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과 행복한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하는 정치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여 직업에 대한 가치를 창조하는데 의미를 갖도록 하여야 한다.
조직 내에서 일하는 부정적인 사고방식보다 풍요로운 사고방식으로 과거에 겪은 실망과 절망보다 미래의 희망에 대하여 가질 수 있다는 기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특히, 일하는 정치조직에 대한 리더(Leader)일 경우의 리더 십은 성공할 수 있는 핵심 원칙을 아래와 같이 세워 조직의 구성원과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1. 정치조직의 효율성, 신뢰성, 사회적 책임 중심으로 하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리더는 정치조직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직구성원의 개인적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
2. 정치조직의 나아갈 길의 방향을 분명히 정하여 직무를 통한 목표 달성을 위하여, 조직구성원의 의욕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더욱이 정치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목표가 일치하도록 목적과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3. 정치조직 내의 직무환경조성과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구축하여야 한다.
직무환경은 긍정적인 일을 하면, 직원 간의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발전된 직장문화를 구축함으로써, 일의 성과를 높일 수 있다.
긍정적인 조직문화는 조직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리더와 좋은 파트너가 되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4. 정치조직구성원의 능력과 헌신을 최대한 끌어올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조직구성원의 성취감과 만족감으로 직장에 대한 기쁨을 누리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만족감의 풍요로움은 조직 내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조직에 대한 적대감이나 비난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5. 정치조직 내의 리더와 조직구성원 간의 책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리더는 비난보다 칭찬을 많이 하여야 하며, 책임과 관련이 되는 대화는 원활하게 하여야 한다.
리더와 조직구성원 간에는 상하관계보다 파트너 관계로서, 리더가 앞에서 이끌어 주는 존재가 되어 목표와 기대치에 관한 결과는 책임을 지고 관리하도록 하여야 한다.
6. 정치조직은 글로벌 시대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부정적인 두려움과 불안, 정체와 회피 등에 관한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아이디를 생성하여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생성은 실험과 혁신으로, 리더가 스스로 잘 파악하여 목표 달성에 대한 선택과 결과에 대하여 검토하고 책임을 져야한다.
7. 정치조직의 리더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낙관적인 태도로서, 유머적인 말을 잘 활용하여 조직구성원들에게 낙천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여야 한다.
8. 정치조직의 리더 자신은 조직구성원들에게 약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행동을 생활화해야 한다.
리더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는 부도덕적 행동으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 행동에 대한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9. 정치조직의 리더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즐거움을 찾아내야 한다.
리더는 조직구성원들에게 풍부한 이미지와 영감을 주는 재료를 제공하여 상호 간의 파트너로서 협조하여, 창조적 성향이 우러나오는 동시에 결과에 대한 즐거움을 함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창의력이란,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리더와 정치조직의 구성원 간에 모두가 공감하는 소소한 노력에 의한 창의력에 기쁨을 나누면 직무의 효율성을 높여주게 된다.
직무의 효율성은 신체적, 지적, 정신적, 감정적, 사회적, 즐거움을 주게 되는 요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결국, 일하는 조직의 리더가 원칙을 세워 실천하면, 미래에 대한 창조적인 문제해결과 직무를 통한 상상력이 넘치는 혁신에 관하여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정치조직 내의 리더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직구성원들로 하여금 일의 의미를 찾아 행복한 삶을 갖도록 하는 리더의 역할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5. 트럼프(Trump)의 정치적 리더 십
정치적 리더 십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제45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쏟아내는 거침없는 말은 과연 머리에서 한 번 생각하고 나오는 말인가를 모든 사람이 의구심을 가지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충격적인 말을 보면, 한반도의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든가, 링컨만 빼면 역대 자신 같은 미국 대통령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그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자신감에 찬 말처럼 들리지만, 막상 사업가로서 이루어 놓은 능력을 보면, 시카코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과 타워, 라스 베가스의 트럼프 호텔 등만 보드라도 그는 사업가로서의 경제적 수단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의 정치적 리더 십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 제45대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허풍을 떨면서, 호랑이 등을 올라서 탄 기분이지만, 계속 등을 타고 달리든가 아니면 잡아먹혀야만 한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말을 하였다.
그는 미국은 세계 최 강대국가로서의 대통령이 된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가들의 놀라움과 불안감을 나타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사업가로서 경제적 리더 십은 정치 상황에서도 정치적 리더 십을 잘 접목하여 발휘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이 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한 요인은 다양하지만, 여기에서는 필자의 생각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즉시 미국을 다시 위대한 국가를 상기시키면서, 꿈과 희망 그리고 염원을 이룰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겠다며, 구체적으로 인프라 재건과 경제개혁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 공정한 경쟁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밝힌 것은, 자국에 대한 잠재력과 창조력으로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치적 리더 십 발휘하겠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모든 국가는 파트너 십으로 갈등과 분열을 청산하겠다며, 미국의 힘을 상징으로 하나로 결집하려는 정치적 큰 꿈은, 인종과 종교, 사회, 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미국을 위해 모든 정치적 역량을 집중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서 보여준,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많은 실망을 안겨준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미동맹의 동반자가 된 그는 북한을 미치광이라고 매번 표현하면서, 한국을 보호 해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듯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이 수차례 도발을 감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만 100%로 상승만 주장함으로써,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는 우리의 외교와 안보에 대한 불안만 가중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서만 보더라도, 트럼프의 정치적 리더 십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첫 정상회담에서 완전 비핵화로 한반도 평화 무대의 고도화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트럼프의 정치적 리더 십으로는 북미 간의 2차 하노이 회담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연유는 북한 측은 영변 핵시설 폐기 조건으로 안보리 제재 해제 요건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트럼프는 영구적인 완전한 핵 폐기를 제시함으로써, 북한 핵 폐기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트럼프의 정치적 리더십은 부동산 사업가다운 투기적 일괄타결식의 정치적 리더십은 “톱 다운” 식으로 강력히 추친 했던 것이었다.
결국, 트럼프의 정치적 리더 십은 무대에서 배우가 멋진 쇼만 보여주는 연출뿐인 리더 십이라고 할 수 있다.
6. 오바마 정치적 리더 십
미국 제44대 대통령인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는 아버지 케냐 출신 흑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 시니어(Barack Hussein Obama) 와 미국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스탠 앤 던함(Stanley Ann Dunham) 사이에 1961년 8월4일 태어났다.
부모들은 1960년에 결혼하여 1964년에 이혼을 했으나, 어머니는 1967년 인도네시아 출신의 유학생과 결혼하였으나, 1980년에 다시 이혼 했다.
학문적 열정이 강한 어머니는 14년 동안 인류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까지 받는 끈질긴 노력가이었다.
오바마는 자신이 혼혈아로 태어난 것을 원망을 하지 않았으나, 유년기 시절에는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성장하였으며, 1971년 오바마가 10살이 되던 해에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에 다녔으나, 백인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소외감과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1979년 청년 오바마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옥시덴탈 대학에 들어가면서, 백인이 아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인종에 대한 정체성을 확실히 갖겠다는 생각에 흑인문화를 경험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오바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원천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은, 미국 기업들에게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투자 정치운동을 위한 1분정도의 대중 연설을 할 기회를 가진 때부터이며, 이때 자신이 활동적인 정치적 리더 십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다.
그 후, 컬럼비아대학교 교환학생에서 정치학 공부를 22세까지 한 후에, 30세까지 하바더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 생활을 35세까지 하면서 시카고대학교 헌법학 강의도 했다.
오마바는 아내 미셸 로빈슨 오바마(Michelle Robinson Obama)를 만나 1992년 10월 18일 결혼한 것은, 시카고 시들리 앤 오스턴 법률회사 인턴사원으로 있을 때, 피부색이 같은 동질감과 미녀인 그녀에게 친근감이 들어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오바마가 정치적 입문하게 된 동기는, 1996년 3월 민주당 예비선거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파머 후보자 외 3명이 중복 서명한 유권자, 위조 서명, 자격 없는 유권자 서명,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위임장 등을 선거법위반사항을 들어 경쟁에서 탈락시킴으로써, 민주당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0년 39세 나이로 연방하원의원 민주당 예비선거 경선에서 일리노이주 제1 선거구 연방하원 민주당 4선 의원인 보비 러시에게 패배를 맛보았으나, 2004년 11월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70%의 지지율을 획득하여 43세 나이로 당선되었다.
2007년 오바마는 46세 나이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을 하면서, “미국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정치적 리더 십 가진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바마는 대통령 출마 선언 의미를 부활시키면서, 강력한 연설로 “링컨은 1858년 노예 반대 연설인 ”분열된 집“을 낭독하면서, 국민의 화합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2008년 11울 4일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오바마는 47세 나이로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미국의 흑인 지도자로서 세계를 향한 멋진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모든 미국 국민은 자원봉사 하는 힘으로 새로운 미국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국민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며, 근면과 정직, 용기와 공정성, 인내와 호기심, 충성과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자원봉사 정신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자발적으로 남을 돕는 인간 존중의 정신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더욱이 오바마는 시민봉사단(Citizen Crops)을 창설하여 대규모의 봉사단조직으로 국가의 긴급 재난구호에 전 국민이 자원봉사 정신으로 참여하는 민주적인 리더 십 발휘하였다.
2012년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sandy)가 뉴욕 주 등에 강타하자 즉시 중대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피해지역에 대한 보조금, 긴급 대출 등 연방 재정 지출에 대한 조치를 강구 했다.
한 치도 알 수 없는 대선의 선거운동을 중단하면서까지, 재난지역 국민의 고통과 좌절의 늪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주는 정치적 리더 십 발휘하여 재선에서 성공을 가져오는 결과를 얻었다.
오마바는 마음속으로 “내가 흑인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나 자신을 부끄러워 한다.”고 다짐을 했다.
언제나 자의 뿌리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자신의 취약점을 파악하여 새로운 전환으로 성공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것을 결심했다.
오바마의 정신세계는 링컨과 케네디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지배했으며, 흑인에 대한 백인 중심 사회에서 국민의 화합과 평등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가졌으며, 사회의 급진적 개혁보다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민주적 화합의 리더 십 발휘했다.
민주적 화합의 리더 십 공동체적인 가치가 기반을 제공하고 평등주의적인 신념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리더 십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주의가 화합된 공동체로서 서로 얽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옷감을 짜는 것이라고 오바마는 믿고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라는 나라는 고정된 계급체계 안에서 지위가 아니라 개인의 근면을 통해서 성공이 가능한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모든 사람이 성실히 일하여 자신의 꿈을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화합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했다.
오바마는 지나친 당파성으로 진실된 정치논의가 부재인 정책 결정보다도 정당 간의 협력과 화합, 상대의 옹호로서, 실천에 옮기는 법의 개정과 이슈를 민주적으로 화합하는 정치적 리더 십을 가졌다.
오바마의 민주적인 화합의 리더 십은 국경을 초월한 결속 외교에 있어도 잘 나타나고 있었으며, 북한의 비핵화 정책 강화에 따른 한미동맹의 공고화로 동아시아의 평화 체제 구축에도 공고화했다.
7. 힐러리(Hillary)의 정치적 리더 십
2. 정치적 리더 십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가정과 남편을 버리지 않고 남편에 대한 실망과 고통을 사랑으로 감싸버린 철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가족과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통찰력, 지능, 야망 등으로 정치를 사랑할 수 있는 리더 십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지혜와 용기 있는 정치적 리더 십은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많은 남성 정치인을 두렵게 하는 정치 지도자가 된 것이었다.
그녀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겪었던 고통의 시간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남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에게 자신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아름답게 그리고 능력을 갖춘 정치 지도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미국 역대 다른 퍼스트레이디보다 정치 전문교육과 훈련을 거쳐서 독립적으로 정치활동을 맹렬히 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춘 여성 정치 지도자이다.
그녀는 백악관 안주인으로서, 화려한 웃음으로 사교활동과 재취 넘치는 언변으로 새로운 시대의 꿈과 열정으로 정치적 희망을 가진 여성 지도자이다.
그녀의 리더 십의 특징은 한 번 약속한 일은 철저히 기억하고 행동으로 잘 지키는 정치 지도자로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찬사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인 용서하는 마음으로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받은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었으며, 인간 세상에서 죄악에 대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정치를 사랑하는 위대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혼을 선택하지 않은 연유는 정치적 이익이든, 딸의 행복을 위해서든, 결국, 정치를 사량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정치적 리더 십은 여성들이 정치, 사회, 교육 그리고 법률 분야에서 남성들과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정치적 리더 십은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여성 권익을 신장시키는 일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았으며, 여성 낙태를 여성들이 와전한 평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8. 푸틴(Putin)의 정치적 리더 십
러시아(Russia)는 1917년 2월 혁명 후, 1924년까지 소비에트 사회주의인 연방공화국이었다.
1990년 2월 구소련 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를 꾀하며”라는 정치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일당독재에서 복수정당제도가 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구소련 공산당 서기 고르바초프가 되었다.
1991년 연방정부의 기능 불능 상태에서 독립국가연합(CIS)결성 합의를 함으로써, 구소련은 완전 해체되어, 1992년 1월 1일에 러시아를 비롯한 11개 공화국은 완전 독립국가가 되었다.
푸틴은 1952년 10월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의 노동자의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에 첩보영화 “창과 방패”를 관람한 후에 첩보원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1975년 KGB의 첩보원으로 제의를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학대학을 졸업하고 KGB요원 훈련학교를 마치고 방범조사원으로 일을 했다.
그 후, KGB해외 정보국 요원으로 동독에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권력의 허무함을 느꼈다.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노선의 동참 요청을 거부하고, 1991년 개혁주도 세력의 경제 민영화를 추진한 추바이스 전 제1부 총리와 함께 일을 했다.
1991년 소련 공산당 보수파 중심이 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 반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쿠데타는 2일 만에 실패하자, 옐친을 지지한 개혁파의 기수인 솝차크의 체포 명령이 떨어졌으나, 푸틴은 솝차크의 구조대를 구성하여 풀코보 공항에서 KGB 요원보다 앞서 그를 구조했다.
훗날, 솝차크는 푸틴을 보고 정열과 충성 그리고 노력가라는 칭찬을 했다.
1994년에서 2년간을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을 지내면서 수많은 인재를 만난 것이 훗날 자신의 정치적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1999년 국가안보회의 서기를 겸하다가 총리를 했으며, 옐친 대통령에 의하여 대통령권한대행을 했다.
푸틴은 2000년 5월에 제3대 대통령, 2004년 제4대 대통령, 2008년 제10대 총리, 2012년 제6대 대통령, 2018년 제7대 대통령이 되면서, 푸틴은 2024년까지 임기가 보장되는 대통령이 되었다.
푸틴은 권위주의 독재체제로서 장기 집권을 통한 대외노선을 강화하는 평창주의로서 집권의 욕망을 영위하는 리더 십을 펼치면서, 끝없는 정치적 욕망의 리더 십은 전체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정치 지도자의 모습이다.
2004년 9월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아 공화국의 한 학교에서 체첸 반군이 들어 닥쳐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저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푸틴은 즉각 전차와 공격헬기를 동원하여 아이들 인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강압 진압하여 수백 명이 인명피해를 냈다.
푸틴은 전체주의 독재국가의 잔인한 지도자로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적인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독재자의 끝없는 정치적 욕망은 국제사회의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푸틴의 정치적 욕망의 리더 십으로 인하여 국민의 마음이 불신으로 돌아서자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하여 희생의 양(scapegoats)을 찾아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러고 했다.
그 때, 러시아의 최신형 오스카 급 전략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 해에서 훈련 도중 원인불명의 폭발로 해저 108미터에 침몰되었다.
푸틴은 휴가에서 모스코바에 즉시 귀환하지 않고, 보안의 이유로 서방측의 구조지원을 거절하여 118명의 군인을 전사시켰다.
푸틴은 국민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희생의 양으로 삼았으나 결국, 푸틴의 지지도는 50%까지 하락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푸틴의 끝없는 정치권력의 욕망은 국민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괴멸(destruction)시켰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도 푸틴의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은 마치, 한 마리의 독수리가 주둥이를 쪼아 털을 뽑아 다시 돋아나게 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서 높고 넓은 창공을 향해 비상하듯이, 임기가 2024년까지 보장된 장기 집권을 통하여 정치적 욕망의 리더 십 펼치고 있다.
푸틴은 강한 러시아 제국의 재건으로 표트르(Pyort)대제(러시아의 황제)의 꿈을 꾸는 강력한 정치적 욕망의 리더 십이라 할 수 있다.
9.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
정치적 리더 십
1978년 정국의 혼란 속에서 해성처럼 등소평의 지도자가 나타나서 집권한 후, 중국 역사상 한 번도 시도한 일이 없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새로운 통치 체제를 구축했었다.
1985년 등소평은 중국의 개혁과 개방 정책은 위험한 실험이라고 선언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모택동의 건국이념의 통치 방식인 사회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여 경제적 안정과 발전을 시켜나갔다.
중국이나 세계의 역대 지도자 중에서 등소평만큼 수많은 역경과 위기를 겪고 정상에 오른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등소평을 작은 거인, 불멸의 지도자로 칭하는 연유는 뛰어난 국가 경영전략과 리더 십으로 좌파와 우파를 하나의 목표로 통합시켜, 시너지 발휘하는 균형의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등소평은 후계자를 미리 키우면서, 과오만 탓하기보다 성과를 인정 해주는 포용과 관용의 정치적 리더 십을 펼쳤다.
등소평의 창조적 삶과 지혜, 집념과 끈기, 인간관계에 의한 처세술로 불꽃 같은 인생을 살은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
등소평 실용주의의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로서의 리더 십은 개혁과 개방을 위한 “흑묘 백묘(黑描 白描)”라는 말로, 중국발전을 위한 전략과 융통성 있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로, 털 색깔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은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좌우파의 흑백논리식의 이분적인 혼란보다 국력을 증가시키고 인민들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 실용주의를 설파했었다.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은 문화대혁명으로 누명을 쓰고 타도당한 핵심관료, 지식인, 과학기술 인재 등을 복권시켜 국가 발전에 재 등용하는 인적 쇄신의 창조적 파괴를 시도하였다.
더욱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최대 사건의 피해자인 류사오치 주석을 복권시키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등소평은 반동분자, 반혁명분자, 반역자, 지식분자 등의 계급적 오명으로 명예가 실추된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진정한 정치적 지도자였다.
등소평의 경제개혁을 위한 창조적 파괴의 정치적 리더 십은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좌파에 의한 부패한 경제를 대수술을 단행하는 경제개혁 조치를 하였다.
등소평의 국영기업과 산업 전반의 쇄신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 십은 안정과 단결로 생산력을 높이고, 당의 지도력 쇄신은 물론, 공기업과 공장관리의 제도를 개선하였다.
또한, 과학기술의 신뢰와 존중으로 생산력을 높이고, 외국의 선진기술과 지식기술의 도입을 위한 강력한 지도력을 펼쳤다.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은 모택동의 계급 투쟁 혁명 일변도의 “파괴적 대파”에 대하여 지도력에 대응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통치 체제의 새로운 대안으로 “창조적 대파”를 단행하였다.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은 국가 경영에서 경제적 부강, 국력 강화, 인민의 생활수준 향상의 방법이 무엇인지, 결정에 대한 판단기준을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은 정책과 사업추진의 실천에서 실적과 성과 중심이었으며 창조적 실용주의이었다.
이는 진리는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실천은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증명된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은 최악의 상항인 위기를 뛰어넘어 기회로 만드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이는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 상황을 바꾸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의 리더 십이었다.
등소평이 두 번째 실각하여 노동수용소에서 노동자 일을 하면서, 생존의 최선 방법을 고민하는 일념을 가지면서, 자기 자신의 일을 위한 정신적 안정과 건강관리에 집중하였다.
등소평이 복권되어 정치권력을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빠른 판단과 실리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 연유는 유배 생활 2년 만에 큰아들이 핍박과 고문에 못 이겨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부상 입고 척추 반신의 불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택동을 원망하지 않고 자존심을 버리고 도움을 청하는 등소평의 간절한 선처를 부탁하는 편지가 모택동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처럼 등소평은 역경이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열악한 환경을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선 방법을 찾아내는 지혜로운 정치 지도자인 것이다.
등소평의 위기 관리의 리더 십의 원칙은 역경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위기는 고통이 아닌 교훈의 의미로 받아드리고 고난을 변화와 성장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무엇보다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의 특징은, 용서와 관용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정적들을 보복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억울하게 타도당한 동지들을 능력에 맞게 등용하였다.
등소평이 정치적 리더 십에서 잘못된 것은, 1989년 6월 2차 천안문사태 때,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노동자, 시민을 탱크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결국,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 십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소평은 자신을 반대파의 권력층에 의하여 직위를 박탈당한 상황에서도 무모한 자존심이나 강한 반발을 하지 않고 지혜롭게 처신한 것은, 인내를 가지고 기회를 기다리는 정치 지도자라는 것이다.
등소평은 언제나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중요시하여 기회가 왔을 경우에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강력히 승부를 내는 결단력이 있는 지도자라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며 당당한 태도와 자신감으로 포기할 줄 모르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는 것이다.
10. 시진핑의 정치적 리더 십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1928년 장개석과 손문은 소련과 단교하여 국민당의 국민정부를 세웠다.
1949년 일본의 침공으로 공산당과 합작하여 일본을 물리쳤으나 국공내전으로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도피하여 정부를 세우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창설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실권을 잡아 개혁과 개발 노선의 정책을 추구했다.
1989년 천안문사태로 장쩌민이 주석이 되었으나, 2005년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총리체제가 되었다.
2007년 제17차 당 대회 시에 태자당의 일원인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정치적 후계자인 리거창을 제치고 상무위원 9명 중에 6위로 다크호스처럼 급부상했다.
시진핑은 2010년 중국 부주석과 공산당 중앙조사 위원회 부주석에 오르고, 2012년 중국 국가 주석과 당 총서기가 되었다.
2013년 중국 혁명 제1세대의 마오쩌둥과 개혁과 개발정책을 추진한 덩샤오핑, 혁명 후세대인 장쩌민과 후진타오에 이어 중국의 13억이 넘는 인구의 정치 지도자로서 시진핑 시대가 되었다.
시진핑의 정치적 리더 십은 국가 권력을 이용한 카리스마적 야망을 가진 지도자이다.
중국 공산당 정치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며, 과거를 이용한 권모술수의 리더 십이었다.
그 후 덩샤오핑은“흑 묘 백 묘)론으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 좋다는 실천과 실질을 추구하는 실용주의 리더십이었다.
반면에 시진핑은 자신 정치권력의 목적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견디며 기다리다가 기회가 왔다면, 정치적 타이밍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기회주의자이며, 미래의 야망을 지닌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시진핑은 미래의 창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회가 오지 않으면 물러서 있다가 기회가 왔다면 과감히 행동하는 지도자이다.
시진핑의 성장 과정을 보면, 부친은 혁명 투사인 시중쉰으로서, 공산당 개국공신이며, 마오쩌둥은 제갈량보다 지략이 뛰어났다고 높이 평가를 했다.
시중쉰은 리젠퉁이 집필한 소설 류즈단 사건에 연류가 되어 옥중에서 죽었으며, 그는 평상시에 시진핑에게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고 화합과 단결로 합쳐야 한다는 미래의 정치 지도자로서 리더 십을 교육시켰다.
시진핑 14세 때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집은 몰수당하고 가정의 어려움이 당해 반동의 자식이라는 죄목 아래서도 시진핑은 기회가 올 때까지 쥐 죽은 듯이 지냈다.
시진핑은 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하여 신청서를 냈으나 부패 분자의 자식이란 이유로 입당 허가가 나지도 않아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신청하여 11번째 허가를 받는 끈질긴 집념을 가졌다.
시진핑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가정과 자신의 미래를 바꾸겠다는 꿈을 가지고 언제나 자신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 지느냐에 신경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간직한 100번 넘게 기운 담요를 향상 옆에 두면서 바라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외형적으로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비취는 시진핑은 내적으로는 절대로 자신의 정치권력 세력이 미래를 창조하고 지배할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우직하게 견디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결국, 중국의 세계 제1위의 인구를 가진 국가의 카리스마적인 야망을 가진 정치 지도자의 리더 십이다.
외형적으로는 큰 체구와 온화한 미소를 지니고 소탈한 성격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야망을 알 수 없는 지도자이다.
11. 처칠(Churchill)의 정치적 리더 십
정치적 리더 십
윈스턴 처칠은 20세기 영국에서 위대한 정치인으로서 리더 십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이끈 전쟁영웅이었으며, 노벨문학상을 탄 명문 작가이었다.
오늘날은 정치인이라면, 문학과 예술에 아름다운 지적 능력의 소유자라야만 탁월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의 폭넓은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통찰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위대한 정치적 리더 십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유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와 한 번 결정한 것에 대한 강한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치적 생명과 신뢰성을 지키기 위하여 의회를 설득하여 나치에 대항하여 싸우자는 명분은 자신을 위한다는 것보다 영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군인으로서, 오랜 투쟁을 경험했으며, 많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는 세속적 영광을 위하여 자신 생각을 적극적인 용기와 행동으로 정치적 리더 십을 발휘하였다.
그는 문학작품을 하루 종일 글을 쓰지 않고, 구술하는 방법으로 생각을 모으고 있는 동안에 담배와 알코올을 섞고, 연보라색 벨벳 작업복을 입고 자신 이름의 첫 글자를 새긴 슬리퍼를 끌고 마룻바닥을 서성이면서, 깊이 연구하여 고심 끝에 만들어 낸 문장을 큰소리로 뱉어냈다.
그는 밤중에도 술을 홀짝 들이켜고 불붙이지 않은 시가를 씹으며 구술을 멈추지 않고 산문을 뱉어내면, 타자수는 자판을 두드리며 말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쉬는 시간 없이 브랜디를 마시고 시가를 피우면서, 쓴 작품이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찰스 디킨스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하였다.
그는 세계 지도자들이 중동과 러시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러시아를 향해 “철의 장막”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여 그를 세계적인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는 영국을 대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정치적 자질 덕분이었으며, 다른 어느 정치인보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이면서, 변화무쌍한 정치적 리더 십의 정체성을 나타내면서, 정당정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좌파와 우파 양쪽에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근거는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활동을 한, 정치가이자 사회개혁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회개혁가로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저임금 근로자 중에 여성 근로자를 돕기 위해 임금위원회 법안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민이 격심하게 노동한 대가로 생활임금 수준 이하로 받는 것은 국가의 죄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연유는 단순히 제국이나 경제를 위하거나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정이 많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며, 처칠 또한 영국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따라서 처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12. 캐머런(Cameron)의 정치적 리더 십 (전 영국 총리)
정치적 리더 십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총리가 된 그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도 자신감 넘치는 계산된 행동으로 취재진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 멋진 모습은 국민을 감동시키기는 충분하였다.
총선거 시에는 만삭이 된 부인을 유세장에서 함께 누비며 국민에게 “국민의 표”를 호소하는 연설은 젊은 지도자의 멋진 모습에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의 힘이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대처리즘(Thatclerism)적인 리더 십으로 확실한 반공주의와 신자유주의 정치이념으로 국영기업을 민영화시켜, 1990년대 경제 호황을 가져오게 하여 강한 영국을 만든 정치 지도자였다.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젊고 신선한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이념 스펙트럼을 넓게 가지고, 기업의 노조규제, 어린이 건강, 교육의 질, 노령은퇴자의 빈곤 문제 등 해결하는 개혁의 리더 십을 발휘하였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1998년 이후, 서비스업, 제조업, 건설업 부분에서 구매 관리 지수(PMI)를 최고 치를 기록하였다.
경제 활성화를 위한 감세정책으로 법인세율을 크게 낮추고, 보험료를 면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그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의 핑퐁외교(Ping-Pong)로 상호협력과 동반자 역할을 하는 정치적 리더 십을 발휘하여 영국의 경제적 성장을 촉진 시킨 정치 지도자였다.
13. 나폴레옹(Napoleon)의 정치적 리더 십
정치적 리더 십
나폴레옹(Napoleon)은 자신의 존재만을 믿고, 카리스마, 정력, 실용주의 정신으로 군사적 야망과 정치적 야망을 이룬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중적 인기로 국민투표를 통해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다시 황제가 된 영광스러운 정치 지도자가 된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무엇인가?
그의 강력한 권력의 리더 십은 자신의 후견제도와 보상 제도를 만들어 지지자들의 충성심을 키우면서, 반대파들에게는 공포감 조성과 모략 등으로 보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의 강점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관해서는 무엇이든지 탁월한 능력으로 카리스마적, 대범과 모험심, 자신감, 투지와 열정, 선경지명 등 계획을 세우고 조직적으로 뛰어나 기술적인 정치적 리더 십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독재자로서 권력을 독점한 후, 지나친 통제와 모략 등으로 무조건 충성과 지지를 요구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합법화시켰다.
그는 이탈리아를 점령하기 위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는 전투에서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한 요인은, 군사적 전문성과 지형학에 정통하였으며, 현실적으로 화려한 형식적인 전술보다 군사들의 음식과 의류 같은 기본적 문제를 충족시키는 것이었으며, 부정적인 사고력보다 긍정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리더 십이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지도력은 이 험악한 눈산을 넘어가면, 우리에게 명예와 영광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연설 하여 병사들을 감화시켜 이탈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뒤에서 침묵하거나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치권력을 탐닉하면서, 강압적이고 독재적인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통치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과 혁명 후, 프랑스의 이상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면서, 자신의 의사전달은 상의 하달식 방법만이 혁명의 성과를 계승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력이 강해지자 자아 도취에 빠져서 러시아 침공 시에 50만 명의 군사들을 눈보라 속에서 죽게 만들은 전투가 그의 최후의 몰락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남긴 유명한 명언 중에서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하였다.
이는 1813년 Lemarois 장군에게 쓴 편지의 일부라고 한다.
과연, 그의 정치적 리더 십에 대해 불가능은 없다는 말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1%의 성공 가능성을 향해 꿈과 희망 가지고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4. 드골(De Gaulle)의 정치적 리더 십(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1890년 11월 22일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지방으로서, 벨기에 국경 가까이 위치한 제조업과 직물생산의 중심지에서 독실한 가톨릭 가족의 아버지 앙리드 골드와 어머니 잔 마리 드골 사이에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고집이 세고 심술쟁이며,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강한 성격으로 언제나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을 즐거워하는 리더 십의 소질이 있었으며, 고전과 철학 분야를 탐구하며, 창의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서 단막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10대 시절 후반부터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자기 행동 방침에 집중하여 지력과 경력을 쏟아 붇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미래를 준비하는 리더의 자질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훗날에 프랑스의 자존심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불굴의 리더 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19살에 군에 입대하였으나, 성격은 논쟁을 좋아하고, 완고하여, 독선적인 성격이었지만, 사관 학교 시절에는 훌륭한 마음과 진정 괄목할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초급장교 시절에는 헌신적으로 부하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소대원들에게는 명예와 위엄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뛰어난 초급장교였다.
그는 베르핑의 격렬한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2년 동안 탈출을 시도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용감했으며, 자신이 죽음에 직면하여도 굳세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용맹한 것을 자기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는 2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서 프랑스 군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으며, 30대가 되어서, 그는 지적으로 성숙하여 강연하거나, 프랑스 군내의 고위 장교들과도 지적이고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의 리더 십에 관한 생각은 통찰력으로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데 이론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위대한 인물이란,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고독하고,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위기의 순간을 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판단하였다.
1940년 5월 독일이 프랑스 침공 전날 밤에 프랑스 제4기갑사단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는 포화 속에서 사단을 조직하여 몇 번이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이고 사령부의 협조 없이 공격했던, 군부대의 작전은 전술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던 것이었다.
몰락하는 정부에서 보여준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의 리더십은 프랑스 수상의 관심 대상이 되었으며, 그는 프랑스군 지휘계통을 뛰어넘어 국방차관에 임명되었다.
프랑스의 패배로 항복이 임박한 혼돈 속에서 그는 처칠 및 영국과의 관계를 형성했으며, 독일의 꼭두가시가 되지 않겠다며, 런던으로 도망쳐서 스스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정당한 프랑스 민주주의를 재현시킨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으며, 1947년 국민연합(RPF)를 조직하였으며,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해체하고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제4공화국의 붕괴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다시 정계의 복귀하여 총리가 되었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할 수 있는 제5공화국을 발족하면서, 새 헌법에 따라 1959년 1월에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12개 아프리카 식민지를 독립시켰다.
그는 프랑스가 알제리와 충돌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직전에 다시 해성처럼 나타나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는 정치적 리더 십을 발휘하여, 새로운 정부를 만들은 군인이며 정치가로서의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그는 알제리에 대한 식민 지배를 포기하여, 군사 반란을 잠재웠으며,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 억지력 확보와 나토(NATO)의 통합지휘체계에서 프랑스는 탈퇴를 하였으며, 프랑스의 핵보유국을 만들었다.
그의 강력한 정치적 리더 십은 프랑스 민주주의를 바꾸면서, 프랑스에게 새로운 위상과 영향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자신이 차있는 오만과 자존심을 가진 진실로 고독한 사람이었으며, 현대사의 군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용감스러운 전사이며, 선견지명이 있는 리더 십을 가진 지도자로서, 조국을 다시 창조한 인물이다.
15. 사라코치(Sarkozy)의 정치적 리더 십(전 프랑스 대통령)
정치적 리더 십
사라코치는 조그마한 체구와 키에 비해 열정적인 야심에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계를 호령했던 나폴레옹 황제를 연상케 하였다.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청중을 사로잡는 열정적 리더 십으로 청중 연설에서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양손을 뻗치는 제스처는 관중들을 파도치듯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국제사회 외교능력에서 나타나듯이, 아이티를 방문하여 그는 카리브해역 지역의 옛 식민지에 2년간을 2억 7,000만 유로를 지원하겠다며 자신감 넘치는 지도자였다.
그는 우파로서, 이민자들이 극구 반대하여도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민주주의 절차에 있어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견제와 EU의 조정 능력에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정치적 리더 십은, 2009년 4월 15일 G20정상 회의에서도 미국과 독일의 대통령을 향해 온난 방지와 국제 금융 위기에 대해 공격을 하였다.
그는 정치적 공적 생활과 개인 사회생활을 엄격히 구분하는 정치지도자에게 프랑스 국민은 관용으로 관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 아내가 20대 누드사진이 국제적인 언론의 대상이 되어도 부인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함으로써, 그는 낭만적인 정치 지도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16. 마크롱의 정치적 리더 십(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1977년 12월 피카르디주의 주도인 아미앵에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크롱은 성장단계에서 자유로운 성향으로서 프로젝트를 추구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재능은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저해하는 모든 질서, 지위, 신분, 사회적 불공정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나중에 정치적 성향 가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가 문법, 역사, 지리 등 공부를 갈치면서 세상과 동떨어진 문학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할머니 자신의 삶은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마크롱에게는 정신적인 스승이었으며, 할머니가 겪은 전쟁과 우정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마크롱은 16세 때에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재능이 수학에 대한 천재성을 발견했다.
더욱이 하나의 고정된 강박관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생각했었다.
이때 마크롱은 낭테르(파리 제10대학교)의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기회를 얻어 파리 정치대학(시알스포)에 들어갔다.
법과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공동행정(Public Action)을 선택하여 공부하다가 국민행정학교(ENA)에서 1년 반 동안 정부의 인턴으로 일한 후, 4년 반 동안 회계 감사 분야의 수습 기간을 거쳤다.
그 후 30대 초반에 공직 기관에서 민간 기업인 로스차일드 투자은행에서 경제와 산업의 쟁점인 전략적인 선택에서 지도자를 설득하는 능력을 배웠다.
2007년 마크롱은 24살 연상인 자신 선생인 브래지드와 결혼했다.
그녀는 3명의 자녀와 남편이 있었으며, 프랑스어와 라틴어 교사였지만, 마크롱은 자신에 대한 헌신과 용기에 감탄했었다.
마크롱이 30대 중반인 2012년 올랑드 대통령의 요청으로 경제부문의 개혁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2년간 유로존과 경제 분야의 비서관을 했었다.
2015년 프랑스의 경제적, 사회적, 비상사태 시에 경제 산업 장관을 했으며, 2016년 4월 6일 고향 아미앙에서 앙마르슈(전진)운동을 시작하면서, 정치가로서의 꿈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는 부모 세대보다 더 낳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를 혁신하고 열망을 이루는 새로운 얼굴, 새로운 인재 발굴이 필요하다는 역설을 했었다.
2017년 5월, 39세의 나이로 신데렐라처럼 등장하여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때 프랑스의 정치 주역이었던 사회당과 공화당에 대한 국민의 실망으로 국회 의석이 없었던 전진당을 창당하여 당선되자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던 공화당과 사회당은 몰락하였다.
마크롱은 당선된 후, 전진하는 프랑스 당으로 바꾸어 새 정치에 부합되는 보수, 중도, 진보를 아우르는 내각을 구성했었다.
마크롱은 프랑스의 진정한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 후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생산이 없다면, 사회적 모델이 없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기 위한 선제조건은 올바른 경제 정책선택이라고 주장을 했었다.
특히, 생산적 지출보다 임시방편으로 지출을 기반으로 한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높은 부채율로 지출에 대한 자금조달은 적자로 계속 쌓인다는 주장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활성화와 경제 긴축을 위한 논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자는 재정적 적자증대로 경제 지탱한다는 것은 공공 재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후자는 지출을 줄이고 적자를 줄여 성장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양측 모두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에서 마크롱은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에서 공공 재정의 균형을 찾으려 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공공지출의 정도와 효율성, 조세 및 세금 등 각 종 징수금의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라고 주장을 했었다.
공공지출 감소를 추구하는 것은, 긍정적이며, 적자보다는 공공 재정 운영이 공공지출 목표 수립을 통해 실행되어야 한다는 주장 했었다.
마크롱은 공공소비의 최대 효율성을 창출하는 합리적인 템프로 공공지출을 감소할 수 있는 경제적 리더 십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정직한 경제를 우선시하고, 모든 경제행위자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하여 이들에게는 책임량을 부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마크롱은 프랑스의 경제 성장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중대한 구조적 개혁실행을 위한 전략적인 리더 십을 펼치고 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공공정책을 철저히 검토하고, 가장 비효율적인 지출을 단호히 줄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분야에 대한 공공투자와 지출의 지속적인 감소로 경제성장에 집중하는 정책을 단기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공공투자 투입에 있어도 인적자본 확보를 위해 교육기관과 연구기관, 평생교육, 직업훈련 등에 대하여 투자하고 있다.
환경변화에 따른 에너지 소비를 단기 이익을 위해 소비를 억제하였으며, 이를 위해 난방혁신과 전기화를 위한 공공투자의 필요성을 위해 디지털화, 케이블, 철도, 전선, 케이블, 전화선, 텔레비전 등 솔루션 개발을 하고 있다.
결국, 마크롱은 수많은 도전 앞에 전 국민이 하나로 뭉쳐 화해하는 의지로 생각의 자유, 공동체문화, 외부에 개방된 국가를 희망하는 정치적 리더 십을 가지고 있다.
마크롱의 정치적 리더 십은 사회 각계각층의 국민이 새로운 경제개혁을 위한 도전에 참여하도록 하여, 사회적으로 좌우 파의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민주적 위기를 힘을 원동력으로 발전시킨 정치적 리더 십을 펼치는 지도자이다.
특히, 과거의 정치 지도자들의 무기력과 불신을 직시하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영감을 가진 혁명적인 리더 십을 가진 지도자이다.
오늘날은 디지털 혁명, 생태와 기술 산업혁명 등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혁명적인 정치 지도자인 것이다.
마크롱은 꿈을 향한 혁명적인 리더 십은 책임감 다하는 자유와 진보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치적 지도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7. 메르켈(Merkel)의 정치적 리더 십
메르켈은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 호스트카스너와 영어 교사인 어머니 헤어린트카스너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르켈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교사나 통역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경제적으로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어릴 적부터 고된 일을 해야만 했다.
메르켈은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 고통에서 격어면서, 생각과 신념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면, 약자를 위한 배려를 위한 정책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973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같은 물리학도인 올리히와 1977년에 결혼을 했으나, 4년 만에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아 이혼했다.
메르켈은 이혼의 상처를 잊기 위해 정치 생활만 전념하던 중에, 1980년 기민당 연방 장관이 되고, 1990년 통일조약서면 식에 참관하여 탁월한 러시아어 능력을 발휘하여 성공적인 조약체결의 견인차 역할했다.
메르켈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헬무트 콜 전 총리는 독일에서 가장 우수한 여성 정치가로서 훌륭한 지도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메르켈은 1991년 독일 연방정부의 최연소 여성부 장관을 하면서, 1998년에 화학 교수인 자우어와 재혼을 했으나, 남편은 아내의 정치활동에 전혀 관여치 않고 자신의 학문연구에만 몰입했다.
헬무트 콜 수상이 정치자금 문제로 정계를 은퇴를 하자, 2000년 4월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96%의 압도적인 지지로 독일 최초의 여성 당수로 선출되었다.
2005년 11월 우파인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좌파인 사민당의 대연정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제8대 총리가 되었으며, 2009년 9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연정(기민, 기사, 자민)을 성공하여 연임하면서, 잔다르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메르켈은 연속적으로 총리를 했지만, 연이은 선거 참패로 인하여, 2021년에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것을 언론에 선언하면서, 이번 코로나가 제2차 대전 후의 가장 큰 도전이라고 했다.
메르켈은 동독 출신의 여성 총리로서 정치적 감각과 정치적 수단이 뛰어난 담대한 포부와 독선적인 판단에 의한 강한 개혁 리더 십의 소유자인 것이다.
메르켈의 정치적 리더 십은 독일 판 철의 여인으로서 회기적인 정책과 독선적이고 냉철한 판단의 리더 십을 발휘하여 국민과 정치인들을 놀라게 했다.
메르켈은 정치적으로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콜 총리가 지릿대 역할을 했지만, 자신이 정치적으로 홀로서기 위해서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판단으로 가감하게 콜 수상의 버팀목을 버렸다.
메르켈의 총리는 제일 먼저 정치적 선언은 독일이 10년 안에 경제성장률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3개 국가 안에 속하는 것이 목표라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냈다.
메르켈의 리더 십의 발휘는 노동 현장에서 나타나도록 노력한 것은 높은 실업률을 일자리 창출로 낮아지도록 했으며, 독일의 최대 노동자 조직인 독일 노조 연맹의 총회장 나타나서 강한 노조 연맹을 원하지만, 최저임금제도는 일자리 창출보다 경제력 파괴가 빠르며 지금까지 노조가 누려온 복지는 기득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메르켈의 리더 십은 일시적인 국민의 인기를 위한 정치적 포플리즘 아니라 장기적인 독일이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강한 개혁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메르켈의 리더 십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며, 자신이 몰락한 지지 세력도 겸손과 인내로 참으며, 미래의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며 개혁을 추진하는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메르켈의 리더십은 원칙에 의한 판단과 개혁으로 국민에게 당근을 주든가 아니면 채찍을 드는 미래지향적인 리더 십으로 국민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메르켈의 외교 정책의 리더 십은 미국과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협력적인 정책을 강화시키고,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에서도 기존의 정책 유지와 중국과는 상호 간의 경제와 금융 위기의 공동대처를 했다.
메르켈은 핵무기개발을 반대하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더 나아가 탈냉전 후의 국제무대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리더 십을 발휘하고 있다.
18. 아베의 정치적 리더 십
아베 총리는 1954년 9월21일 야마구치 현 나가토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전 외무대신 아베 신타로이며, 친할아버지는 중의원을 했으며, 외할아버지는 A급 전범으로서 전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키이다. 외할아버지는 일제의 파시즘을 기획한 자로 “만주국 건설”에 개입했다.
아베는 1977년 세이케이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1979년에서 1982년까지 철강회사에 근무하다가 외무대신인 아버지 비서관을 시작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부친의 영향을 받은 아베는 1993년 하원인 중의원에 선출되면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정치권력의 핵심인 자유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2000년에 관방 차관을 하다가 2005년 10월에 고이즈미 내각의 관방장관이 된 후, 2006년 9월 자민당의 52세 나이로 총리가 되면서 같은 해에 양원제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
총리가 되면서 정부조직법 개편, 국민투표법 제정을 했으나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여 총리 취임 1년 만에 병을 핑계로 퇴진하였으며, 1955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제2당으로 밀려났다.
2012년 12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아베는 다시 96대 총리로 제기하면서, 무너져가는 일본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아베노믹스(Abenomics) 경제 정책으로 일본이 20년 가까이 이어온 디플레이션 엔고를 2~3% 인플레이션 금융완화로 마이너스 정책으로 경제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엔화를 많이 풀어 자국의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제품 가격경쟁력으로 경상수지흑자를 보겠다지만, 국제금리상승과 금리 바닥으로 해외자금 유출 등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아베의 정치적 리더 십은 선조들로부터 직접 익혀온 패권 지향적인 정치적 리더십 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 걸은 연유는, 총리가 된 후, 일본의 경제 불황과 자민당의 전통적인 지지 계층인 농민 정책의 실정으로 총리 1년 만에 그만두자, 패배에 대한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2007년 불명예 퇴진했던 아베 총리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자,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겠다며, 전통문화를 존중하겠다며, 일본의 우경화와 군사력 강화에 집중하면서 제일 먼저 패권 지향적인 리더 십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고위 각료들을 대동하여 참배하며 극우적인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이 벌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민주 사변,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숨진 246만여 명을 신격화시켜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되어 있는 장소이다.
아베 정권은 경제적 곤란과 지진으로 원전 사고의 방사능 유출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 될수록 아베의 정치적 리더십은 패권주의적 야망인 팍스자포니카(Paxjaponica) 평화의 꿈을 꾸었다.
아베 정권하에서는 국내적으로 사회적 갈등 문제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자국의 이익에 전념하는 패권주의적 정책을 펴면서, 한국과는 독도와 중국과는 센카쿠열도의 영유 권문제로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다.
아베 정치적 패권 지향적인 리더십은 강한 일본의 부활을 꿈꾸는 것으로, 평화헌법 개정의 목적으로 군사 동맹국이 공격받을 경우는 자국의 공격으로 간주하여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실현하겠다고 했었다.
아베 총리의 정치적 리더 십 부재로 자진 사퇴한 연유는,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에 대한 일본 국민의 공포도 있었지만, 무소불위의 아베 신조 정권의 독주로 검찰청법 개정,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인한 올림픽개최 무산 등 언론과 여론의 반발로 정치권력 7년을 넘게 한 총리직 자진사퇴를 하게 되었다.
19. 간디의 정치적 리더 십
정치적 리더 십
간디의 정치적 리더 십의 핵심은 인류는 오직 비폭력을 통해서만,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증오는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리더 십의 요소는 신이 창조한 가장 고결한 존재인 진리, 정의, 사랑 그리고 비폭력으로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비전을 갖게 하였다.
그는 1892년 변호사로서 소송에서 상대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대하여 큰 충격을 받고 폭넓은 교훈을 받아, 인도 사회에 만연한 가치체계인 가족, 카스트제도, 공동체 같은 모든 분파적 요구보다 청렴결백에 대한 윤리를 소중히 여기는 게기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비폭력 저항운동은 1907년 7월 아시아인 등록법에 항거한 일로서,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에게 등록하는 죽음의 법을 거부하는 저항운동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책임자인 스마츠 장군은 자발적 등록한 후에 폐지하겠다며, 타협안으로 그를 회유하였지만, 법은 폐지되지 않자 그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다가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는 석방 후에 비폭력 저항운동에 추종하는 사람들의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요하네스버그 외곽에 톨스토이 농장을 설립하였다.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의 유형은, 1) 연민의 리더 십으로서, 억압받은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신과 동일시하며, 똑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었다.
2) 정치적 리더 십은, 조직의 기술과 카르스마적 지도자로서, 인도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발휘하였다.
그는 최초로 코자라브 마을에 이슈람을 건립하여 활동근거지를 만들어 농민들과 가까이 하면서 농촌지역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하였으며, 지역 차원에서 인도의 언어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영어를 끌어내렸다.
3) 뛰어난 전략화한 기술로서, 진리 추구와 비폭력에 자기 자신의 고통을 결합시키는 비폭력 저항전략을 정립하는 정치적 리더 십이었다.
4) 조직운영과 기술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한 것은, 최고의 조직 운영의 기술은 투명하고, 조직적으로 인간적인 접근으로 원하는 목표를 얻기 위한 윤리적인 수단을 밑바탕으로 한 비폭력 저항, 행진, 단식, 기도 모임 등에서 잘 나타내었다.
5) 관용과 아량으로 자신을 미워하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으로서, 육체적 네 번이나 공격을 당하여도 용서하고 그들을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관용으로 정치적 리더 십을 베풀었다.
6) 정치적 리더 십은 자기 확신과 유머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사용했던 검은 담요를 깔아 놓은 바닥에 앉아서 나무 밥그릇에 토마토와 올리브 오일에다 깡통에 땅콩과 비스킷으로 식사를 하면서, 여성해방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하는 사회운동가인 여성 지도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유모가 담긴 말로 식사를 권했다.
확신과 유머에 담긴 대화의 리더 십에 감동을 받아서 43년 뒤에 그가 암살될 때까지 헌신적으로 제자로 남았었다.
7)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세계관에 대한 폭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몰입하면서도 한시라도 전 세계가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마하트마 간디의 정치적 리더 십은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진정한 평화는 폭력이나 전쟁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진정한 힘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치적 리더 십은 사람중심의 인간적인 접근방법과 수단 그리고 목적의 투명성을 가진 선을 행한 정치가이다.
결국, 그는 강력한 투쟁을 이끈 선구자로서,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정치적 리더 십에 대한 더 높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20. 룰라(Lula)의 정치적 리더 십(브라질 전 대통령)
1945년 10월 27일 룰라는 브라질 북동부 지방의 가라늉스 수도인 헤시피 시에서 152km 떨어진 농촌 마을의 연립주택에서 태어났다.
농촌 마을의 열악한 환경에서 룰라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별거를 하자, 룰라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나뿐인 초등학교조차 가난 때문에 졸업을 하지 못했다.
룰라가 18세 때, 국립직업훈련소인 세나이(senai)에서 수도공 직업 훈련과정을 마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물건을 팔려 다녔으며, 구두닦이, 염색공장, 수도공 견습생, 공장 선반공 등 막노동하다가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기까지 했다.
룰라는 고된 노동시간에 시달리면서도 저녁에는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강한 심념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결단을 가졌다.
1966년 철강 노조위원장을 하면서, 직장노조의 노동직공인 여직원과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가난하여도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1971년 결혼생활 8개월 만에 부인이 임신했으나 너무나 가난한 생활 때문에 임신한 부인이 간염이 걸려 죽을 지경이 되어도 돈 한 푼 없어 병원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룰라는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다.
룰라는 하늘을 향해 돈 없는 서러움에 뼈 속 깊이 통곡하며, 원망과 눈물을 흘리며 방황했다.
룰라는 부인을 잃은 충격에 세상에서 돈 없는 서러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불합리한 구조적 틀을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노동운동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룰라는 과거의 슬픈 기억을 지우기 위해, 1975년에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3명의 자녀를 두면서, 새로운 가정으로 안정을 찾았다.
1975년 금속노조 위원장을 하면서, 파업을 주도하였으며, 1978년 석유노조회의에서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노동자당 창당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을 했다.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 출마를 했으나 선거에 패하면서, 상파울루 기자들 조직인 헤르조기 후임으로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룰라는 1989년 44세 나이로 노동자당의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실패하면서, 1994년, 1998년, 3번이나 대선 경쟁에서 실패했다.
결국, 룰라는 4차례 도전 끝에 2003년 브라질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57세 생일날에 당선의 기쁨을 맞이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룰라의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리더 십은 기업가와 서민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룰라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브라질은 모라토리움(국가 부도)를 선언한 나라가 세계의 관심과 경제성장 위주의 리더 십으로, 2007년에 경쟁력이 강한 미국과 일본을 제쳤다.
2014년 20회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룰라는 세계가 존경하는 일류 국가인 브라질을 만들 수 있는 정치적 리더 십을 발휘하였다.
2010년 브라질은 국내 총생산(GNP)은 2조 235억 달러이며, 1인당 국내 총생산 1만 470달러로서, 물가상승률은 12%에서 4%까지 낮추는 데 성공하는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으며, 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을 위한 분배정책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리더 십이었다.
룰라가 경제성장을 위한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태아를 잃은 뼈아픈 슬픈 기억과 빈곤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삶의 역경을 직접 체험에서 생성된 정치적 리더 십이었다.
룰라의 정신적 멘토인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에 정치적 희망과 야망을 버릴 수 없었었다.
어머니는 문맹자이면서도, 무능한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용기와 가난의 악순환 속에서도 8면의 자식을 키우면서, 끝없는 용기를 주었으며,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에 대해 룰라는 언제나 존경했다.
룰라는 브라질 민주주의를 위해 3선을 마다하고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서 서민대중을 위한 정치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기게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후임자는 군사 독재 시절 게릴라 전사였던 여성 지우마 호세프를 자신의 후임자로 내세웠다.
룰라는 2016년 8월 5일부터 21일가지 브라질 리우데자 네이루세어 올림픽개최가 확정되자, T.V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으며, 국가를 사랑한 정치적 지도자였다.
브라질의 많은 국민은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이 국민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국가의 위상을 높인 대통령을 보낸다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룰라 대통령은 현직에서 물러 난후, 쿠리치비 지역 연방법원이 대통령 재임(2003~2010년)중에 건설회사로부터 계약수주 대가로 뇌물협의에 대한 유죄 선고를 한 것을, 최근에 연방대법원이 뇌물사건 유죄판결을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다.
브라질 국민은 노동자 대부인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의 귀환을 태풍처럼 환영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1945년 10월 27일 룰라는 브라질 북동부 지방의 가라늉스 수도인 헤시피시에서 152km 떨어진 농촌 마을의 연립주택에서 태어났다.
농촌 마을의 열악한 환경에서 룰라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별거를 하자, 룰라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나뿐인 초등학교조차 가난 때문에 졸업을 하지 못했다.
룰라가 18세 때, 국립직업훈련소인 세나이(senai)에서 수도공 직업훈련 과정을 마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물건을 팔려 다녔으며, 구두닦이, 염색공장, 수도공 견습생, 공장 선반공 등 막노동하다가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기까지 했다.
룰라는 고된 노동시간에 시달리면서도 저녁에는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강한 심념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결단을 가졌다.
1966년 철강 노조위원장을 하면서, 직장노조의 노동직공인 여직원과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가난하여도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1971년 결혼생활 8개월 만에 부인이 임신을 했으나 너무나 가난한 생활 때문에 임신한 부인이 간염이 걸려 죽을 지경이 되어도 돈 한 푼 없어 병원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룰라는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다.
룰라는 하늘을 향해 돈 없는 서러움에 뼈 속 깊이 통곡하며, 원망과 눈물을 흘리며 방황했다.
룰라는 부인을 잃은 충격에 세상에서 돈 없는 서러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불합리한 구조적 틀을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노동운동으로 정치판에 뛰어 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룰라는 과거의 슬픈 기억을 지우기 위해, 1975년에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3명의 자녀를 두면서, 새로운 가정으로 안정을 찾았다.
1975년 금속노조 위원장을 하면서, 파업을 주도하였으며, 1978년 석유 노조 회의에서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노동자당 창당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을 했다.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 출마를 했으나 선거에 패하면서, 상파울루 기자들 조직인 헤르조기 후임으로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룰라는 1989년 44세 나이로 노동자당의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실패하면서, 1994년, 1998년, 3번이나 대선 경쟁에서 실패했다.
결국, 룰라는 4차례 도전 끝에 2003년 브라질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57세 생일날에 당선의 기쁨을 맞이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룰라의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리더십은 기업가와 서민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룰라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브라질은 모라토리움(국가부도)를 선언한 나라가 세계의 관심과 경제성장 위주의 리더십으로, 2007년에 경쟁력이 강한 미국과 일본을 제쳤다.
2014년 20회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룰라는 세계가 존경하는 일류 국가인 브라질을 만들 수 있는 정치적 리더 십을 발휘하였다.
2010년 브라질은 국내 총생산(GNP)은 2조 235억 달러이며, 1인당 국내 총생산 1만 470달러로서, 물가상승률은 12%에서 4%까지 낮추는 데 성공하는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으며, 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을 위한 분배정책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리더 십이었다.
룰라가 경제성장을 위한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태아를 잃은 뼈아픈 슬픈 기억과 빈곤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삶의 역경을 직접 체험에서 생성된 정치적 리더 십이었다.
룰라의 정신적 멘토인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에 정치적 희망과 야망을 버릴 수 없었었다.
어머니는 문맹자이면서도, 무능한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용기와 가난의 악순환 속에서도 8면의 자식을 키우면서, 끝없는 용기를 주었으며,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에 대해 룰라는 언제나 존경을 했다.
룰라는 브라질 민주주의를 위해 3선을 마다하고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서 서민 대중을 위한 정치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기게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후임자는 군사 독재 시절 게릴라 전사였던 여성 지우마 호세프를 자신의 후임자로 내세웠다.
룰라는 2016년 8월 5일부터 21일가지 브라질 리우데자 네이루세어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자, T.V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으며, 국가를 사랑한 정치적 지도자였다.
브라질의 많은 국민은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이 국민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국가의 위상을 높인 대통령을 보낸다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룰라 대통령은 현직에서 물러 난후, 쿠리치비 지역 연방법원이 대통령 재임(2003~2010년)중에 건설회사로부터 계약 수주 대가로 뇌물협의에 대한 유죄 선고를 한 것을, 최근에 연방대법원이 뇌물 사건 유죄판결을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다.
브라질 국민은 노동자 대부인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의 귀환을 태풍처럼 환영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28. 정치적 리더 십의 성공을 위한 사고력
1. 리더의 역할
리더는 조직 구성원의 다원하 하기 위해서는 리더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내려놓거나 정신적으로나 마음이 강하게 멘탈을 소유하는 것이다.
리더가 과감히 자신을 내려놓으면, 조직이 주도적으로 창조력이 생기며 조직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리더는 조직 구성원에 대한 명령만 내리지 않고 스스로 목표를 정하도록 하며, 역할을 하게 되면, 개인이 능력에 따라 개인과 조직의 소통을 통해 조직의 플랫폼의 증가로 공동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다.
리더의 역할은 조직의 수평적 관리를 통해 조지의 문제로 인한 위험을 줄이면서, 최종 책임을 지는 것이다.
2. 리더의 가치관과 리더의 방식
리더는 다양한 가치관을 기르는 것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단이 가치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진다는 점이다.
리더는 미래 사회를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자기 생각을 플랫폼에 올려두고 그 가치관을 계속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리더의 일하는 방식은 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분담하거나 협업하는 전통적인 업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대에 인터넷을 통한 각자의 방식으로 일을 연구하고 창조하여 공유하는 일하는 방식으로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일하는 방식은 각자의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공유하게 되면, 파벌이나 학별 등의 개념을 타파하고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3. 리더의 집중력
리더는 집중력을 흩뜨리는 쓸데없는 정보를 스스로 통제하거나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는 자신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일과 삶의 리듬을 통제할 수 이
T는 여유를 가짐으로써, 일에 대한 집중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서 일과 삶의 리듬을 주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어떤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일정한 시간에 차분하게 일만 집중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리더의 집중력은 일정한 시간에 차분한 감정으로 문제를 정확하게 알아내고 자신이 어떠한 방식이라도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게 된다.
4. 성공을 위한 사고력(결론)
조직의 진정한 성공은 가치의 공동 창조력에서 오므로 현실과 미래 세계를 위한 리더의 사고력은 매우 중요시된다.
조직의 성공을 위한 리더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터넷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공동체의 가치를 달성할 수 있는 창의적인 사고력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