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壬午軍亂)에 관하여
1. 임오군란의 배경
1992년(고종 19) 6월 9일 도봉 소사 건으로서, 한국 병들이 군료분쟁에서 발단된 돌발사건이다.
군란의 배경은 민씨 척족 정권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정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사건이었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 척족 정권이 개화 정책을 추진하여 일본과 구미 제국과의 교섭 통상관계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도개혁에 따라 개화파 관료가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으며, 5 영을 폐지하고 무위, 장어의 2 영을 설치하고,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어, 구 5 영 소속 군병들이 불만이 고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의 독점적인 경제침략으로 조선왕조의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일본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1881년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토왜 반정음모 사건 계기로 민 씨 척족 정권은 남인 계열의 수구파에 대하여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계층의 분열과 민 씨 척족 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국고 낭비 등으로 백성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원인이 되었다.
2. 임오군란의 과정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군제개혁 후, 구 5 영 소속 군병은 대부분 실직하고, 13개월이나 군료가 지급되지 않게 되자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 관찰사 김보현에게 원한이 않아 생겼다.
1882년 6월 5일 도봉 소에서 무위영 소속의 구 훈련도감 군병에게 한 달분의 군표를 지급하였으나, 겨와 모래가 섞였으며, 두량도 반이나 모자랐다.
이로 인하여 무위영 영관에 격렬하게 항의한 김춘영과 유만복 등 주동자를 민영호는 고문과 처형을 하도록 하였다.
대규모의 폭동으로 일본공사관을 포위 공격하여 6월 10일 사태가 확대되어 영돈령부사 이최응과 궐내로 난입하여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하였다.
민 씨 척족 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명성황후는 탈출하여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을 하였다.
3. 대원군의 정권 장악
군민이 궁궐로 침입하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기자 대원군은 군란을 적절히 이용하여 재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통리기무아의 혁파와 삼군부의 복설과 척족 정권의 숙청을 위한 최후 수단으로 명성황후의 상을 공포하였다.
대원군은 2단계 개혁으로 척족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여 이재면을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에 임명하여 병재 양권을 장악하였다.
이밖에도 영의정 홍순목, 우의정 싱응조, 어영대장 신정희, 금위대장 조희순, 총융사 임상준, 도승지 조병헌 등 임명하여 등용한 인물들은 남인 계열에 속하는 노 정치가 들이었다.
제3단계로 서정 개혁으로 지방의 미납 세미의 상송으로 군병의 군료와 도민의 식량을 충당하였다.
민폐의 근원이 된 신감채와 해홍채의 징수 금지, 주전금지, 도가의 민폐금지, 무명잡세의 징수금지 등이었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은 여망을 구현시키지 못하고 3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4, 임오군란 이후(결론)
민 씨 척족 정권은 고종의 유신선언에도 불구하고 구태 정치풍토 속에서 정권유지에 급급하여 진정한 개혁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무정견 한 개화 정책만 되풀이되었다.
더욱이 군란 이후, 청일의 압력이 가중되었으며, 특히, 청나라의 조선의 내정, 외교문제에 적극적인 간섭을 감행하여 종주권을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민 씨 척족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난 군민의 저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