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황진이에 관하여!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의 개성의 기생으로서, 1520년 태어나서 1560년대 죽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은, 서경덕, 벽계수 등과 교류한 것으로 봐서 알 수 있다.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 출신으로 맹인의 서녀로 태어나서 15세경에 이웃집 총각이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혼자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게 되었다.
어느 날 황진이 집 앞으로 지나가던 총각의 상여가 집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소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 자신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고 슬프게 곡을 하자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그 후, 기생으로 투신하였으며, 그녀는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게 되었으며,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통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으며,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사제 관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송도삼절을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0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이라고 불리던 천마산 지족 암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키려고 지족선사에게 제자로 수도하기를 청했다.
지족선사는 완강히 거절하자 그녀는 소복단장으로 청춘 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 암으로 가서 죽은 남편을 위해 백일 간 불공을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선사가 있는 옆방에 침소를 정했다.
그녀는 밤마다 불전에서 불공을 드리며 축문을 청아한 목소리로 처량하게 읽게 되자, 천사와 같은 그녀의 불공 축원을 처음에는 무심하게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밤마다 계속되는 청아한 목소리에 마음을 뺏기면서, 선계의 정념은 사라지고 욕정이 생겼다.
결국, 10년 동안 면벽 수도를 했지만, 그녀로 인해 지족선사는 파계를 하여 “십 년 공부 아미타불”이 되었다.
그녀의 젊은 날은 희열이 넘쳐 금강산의 명소를 둘러보며, 서울의 선비와 노래를 부르고 화답시도 지어며 아름다운 산천 경관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같이 보냈던 젊은 선비 벽계수가 떠나가자 시조를 통하여 자신의 뛰어나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 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한데
쉬어 간들 어떠리
다정다감했던 명기 황진이는 기예에 두루 능했으며, 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의 작품들은 관습화 된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표현으로서 시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으로 자신 뜻을 청산이라고 역설적인 표현을 하고, 양반 선비인 벽계수를 자신만이 유혹할 수 있다는 독보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이 죽거든 관을 짜지 말고 개미, 까마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부탁을 한 것은, 거침없는 성품과 시적인 정서를 말해주고 있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녀는 개성 근처의 장단에 묻혔으며, 지금도 장단 판교리는 황진이의 무덤과 살던 집 우물에 약수가 나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