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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기생 논개에 관하여!

기생 논개에 관하여

기생 논개

논개는 진주 목의 관기로서,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중에 진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1593년 6월 말경에 진주 남강 촉석루로 왜장인 게다니를 유인하여 몸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려 순국한 의기이다.

그녀의 순국 사실이 많은 사람들의 구전으로 유포되었으나,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된 것은, 162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녀의 고향은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 마을이었으며, 부친은 주달 문, 모친은 밀양 박 씨로 학덕이 높은 집안이었으나, 13세 때 부친이 병사로 하여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녀가 14살이 되던 1587년에 천하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넘기고 행방을 감추었으나, 모녀는 이 사실을 알고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을 하였다.

김풍헌은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게 심문을 받게 하였으나, 모녀로부터 자세한 전말을 들은 현감 최경회는 무죄로 하여 관아에 머물면서, 병약한 자신의 부인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녀의 재주와 아름다운 용모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그녀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하고는 지병으로 죽게 되자 1591년 18세 되던 해에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왜군과 진주성 싸움을 10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장군은 순국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지켜 본 다음날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군의 승전 연에 기생으로 가장하여 연회에 참석하였으나, 왜군들은 승전 연에서 승리에 도취되어 조선 여성들을 겁탈을 할러고 하자 치욕보다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녀는 19세로서 아름다운 젊은 나이에 왜군의 장수 게다니를 촉석루에서 부둥켜 안은 채 남강으로 뛰어내려 순국한 후,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은 고향땅에 가지 못하고 함양군 서상명 방 자리 골짜기에 묻혔다.

그녀는 나라를 구하려는 충절로 순국했지만, 기생으로 잘못 알려져서, 임진왜란 중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상감 행실도”에는 이름이 올려지지 않았다.

 

진주 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해마다 강변에 제단을 차리고 논개의 혼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졌다.

논개가 순국한지 36년 만에 인조 7년(1629)에 정대율 선비가 의거 현장인 위암의 서쪽 면에 전서체로 의암(義菴)이라고 새겨 놓아 그로부터 위암을 의암으로 불렸다.

그 후, 1백여 년이 지나서 조정에서 논개를 “의암 부인”이란 칭호를 내렸다.

진주 남강 벼랑 위에 세워진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서,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목사 김지 대가 창건하고, 충숙 와 9년(1322) 진주 목사 안진이 중건 하였다.

 

우왕 5년(1379)에 왜구의 침략으로 불탄 것을 조선 태종 13년(1413)에 진주 목사 권층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왜적의 침략으로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10년(1618)에 병사 남이흥이 복원했으며, 경종 4년(1724)에 병사 이태망이 중수했다.

최근 6.25 때 소실 된 것을 1960년 진주 고적 보존회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다.

촉석루를 일명 장원루 또는 남장 대라 불렸으며, 전쟁 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위 본부였으며, 전쟁이 없는 평화 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사용을 했다.

오늘날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진주제일의 관광명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