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義士)는 누구인가?
윤봉길(尹奉吉) 의사는 1908년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나서,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나, 다음 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한다는 의미에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는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사서삼경 등 중국의 고전을 익혔으며,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운동, 독서회 운동 등 농촌 부흥을 위한 온갖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다음해에 농촌 부흥운동에 뒷받침하기 위하여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하여 불우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1929년 부흥원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화하면서, “기사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부흥원에서 학예를 열면서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면서 대성황을 이루게 되자 일제 당국으로부터 주요 인물로 주목을 받았으나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는 지방 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인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를 조직함으로써,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수암체육회를 설치 운영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30년 그는 “장부는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같은 해인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5일 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만주에서 김태식 한일진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렌을 거쳐 중국 칭다오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피면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모색하였으며, 세탁소에서 일을 하여 모은 돈을 고향으로 송금하기도 하였다.
그는 1931년 8월 독립운동의 활동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기면서, 프랑스 조계 하비로 화합 방 동포석로 19호 안공근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그는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인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 영어 학교에서 수업을 하며,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나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호소를 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말하였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일본 동경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를 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는 일제는 시라카와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자, 그는 같은 해의 봄에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파악한 후에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서 미리 김홍일과 같이 실험했던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날 현장에 있었던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 거류민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그는 거사 후에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해 11월 18일 일본에 호송되어, 20일에 오사카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어 12월 19일에 총살형으로 순국을 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희생한 독립운동가로서 역사적인 훌륭한 인물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