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유성룡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 사촌마을에 아버지 유중 영과 어머니 안동 김 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가학을 전수받았으며, 4세 때에 글을 깨우친 천재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향시에 급제하였으며, 심통원이 “양명 집”을 버리고 가자 가장 먼저 양명학을 접하였으나 관심이 없었으며, 주변 환경은 양명학과 앙숙인 성리학이 일색이었다.
이때는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파가 지성계를 장악한 영향으로, 그는 어린 나이에 본관인 안동 풍산과 백운동서원이 위치한 영주와 가까운 곳에서 자연스럽게 성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21살 때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수개월 동안을 머물면서 “곤사록‘ 등을 배우며,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양명 집”을 35년 동안 간직하며 틈틈이 읽었으며,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하며, 양명학을 비판하면서 그 장점을 흡수하였다.
그는 24세 때에 성관에 들어가 대과에 급제한 후에, 첫 관직인 승무원 권지 부정사로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말단 보직을 받았다.
그는 선조 2년 28세 때에 한 번에 6계품을 뛰어넘어 공조 좌랑이 된 것은, 인종의 신주를 모시는 문제에서 영의정 이준경과 맞서 이겼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엘리트 관료가 되어 북경에 가서 국제적 감각을 익히고 돌아와서 이조좌랑,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는 사림의 영수 이이가 삼사가 가세하여 죽은 이준경의 관직 추탈을 주장하였을 때에 홍문관 수찬인은 반대하여 막았다.
그는 선조 6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시묘 살이 하면서, 홍문관 교리를 사양하였으나 35세 때에 선조 9년에 사간원을 헌납으로 다시 복귀를 하였다.
그는 동인으로서 서인 이이와는 서로 당파를 화해시키려고 두 당파간의 화해에 노력을 하였으며, 38세에 홍문관 직제학과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는 율곡의 제자인 정여립의 사건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은거하며 선조에게 상소를 들여 사건의 확대를 막았으나, 정여립의 사건으로 동인들이 실권을 잡자 서인들에게 보복을 강력히 주장한 영상 이산해 등은 북인이 되고, 온건 처분을 주장한 그는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에 선조 24년 정월 일본에 간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귀국하여,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 민심을 동요시키는 사의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그는 조정이 김성일의 보고만 믿고 아무른 대책도 없었으며, 임란 두 달 전에 조정은 신립과 이일을 보내 군사태세를 점검하려 보냈으나. 왜적의 침입이 없다며 걱정할 것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선조 22년 그는 이순신을 전라 순찰사로 복직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이조판서가 되자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그는 정읍현감이 이순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보고 거듭 천거하여 첨사로 옮기에게 한 후에 전라좌수사로 승진시켜 정 3품 당상관이 되도록 하였다.
선조 24년 2월 16일 임진외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비변사와 각 대신에게 재능 있는 장수를 추천하도록 하자, 그는 하급 무관인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임란 3 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 대첩의 승전을 이끌게 하였다.
그는 선조의 파천계획을 반대하고, 세자 책봉을 계청 한 데다가 요동 내부 책까지 반대하자 선조는 제거대상으로 생각하고 서울을 지키는 유도대장으로 임명을 하였다.
신하와 백성들이 파천을 주도한 선조에게 분노하자 파천을 주도한 이산해를 파직하고 그를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신하들의 마음을 달랬다.
선조는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파천을 극력반대하고 요동 내부 책을 저지시킨 그를 동시에 이산해와 처벌론으로 들고 나오면서 영의정과 도체찰사 직을 파직시켰다.
선조는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를 다시 풍원 부원군을 제수하여 명나라의 사신과 장수들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그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너진 군사력을 수습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일본 군가 전력을 다하여 싸우면서, 민심의 동요를 막아내라는 임무로 전선의 총사령관인 도체찰사가 되었다.
그는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임진왜란에 관하여 전란의 원인, 전쟁 상황 등의 수난 상황을 수기 형태로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조명연합군의 공동작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공로로 그는 선조26년에 호서, 호남, 영남의 도체찰사로 제수되었다.
그는 직속 수하인 전라도 순찰사인 권율과 함께 일본군을 물리친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서울을 탈환하여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려는 판단을 하였다.
조명연합군의 상황과 일본군의 상행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파악한 비변사의 장계가 군령을 그에게 통일시켜 달라는 건의를 하게 되었다.
선조는 그에게 군권을 집중시키는 것은 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군사전략에 능한 그에게 비변사가 따르고 있고, 파천과 요동 내부에 반대한 주전론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백성들의 민심은 선조를 버리고 믿는 사람은 유성룡과 권율 그리고 이순신이었다.
그는 선조 26년 10월 임진란 후에 임금에게 건의하여 국가에서 급료를 지급하는 직업군인으로서 자주국방체제를 이룩하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그의 생각은 명나라 군사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그들의 군사지식과 최신무기 제조법 등을 습득하기 위한 생각에서, 적극적으로 지방 군사들을 훈련을 시켰으며,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 군으로 개선하였다.
선조 26년 그는 건강이 좋아지자 고향인 안동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만났으며, 일본군에 의해 집과 원지정사와 수많은 서적과 함께 불타 없어졌지만, “양면 집” 몇 권이 온전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선조 26년 10월 27일 다시 그는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사직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양명 집”을 보고 백성의 마음을 돌릴 생각을 하여 도체찰사를 겸한 영의정직을 맡았다.
2. 사상
그의 사상은 조선의 미래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국방력과 민생이 안정되어야 국방력이 강화 된다는 생각으로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제승방략체제를 다시 진관 체제로 바꾸는 것으로서 임진왜란 전에 주장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진관체제는 앞에서 전쟁에 패하면, 다음에서 막고, 또 패하면, 뒤에서 막는 체제이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중앙에 훈련도감, 지방에는 속오군을 설치하여, 속오군은 양인과 천민, 양반까지 포함시켜 한 부대 내에 섞여 병역의무를 지우는 혁명적 변화를 시켰다.
이는 출신, 양반, 서얼, 향리, 공천, 사천 등 일체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군적에 포함시키는 조선군사제도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국방개혁으로 공사 천인, 아전, 서자 등 모두 군사로 선발하고 가솔들의 숙식을 국가에서 돌보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노비들에게도 과거를 실시하여 합격하면, 양인으로 상승시켜 우림위에 예속시키는 것으로 노비 충군 방안을 밀어붙이자 노비 주인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노비는 군사가 될 수 없다고 반대를 하였다.
그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양반충군과 노비 충군을 밀어붙여 천인들이 벼슬에 등용되고 군사를 뽑았다.
그의 천인 충군론은 사대부들의 격심한 반발로 임란을 극복한 가장 큰 공신인데도 불구하고, 당파의 집요한 공격으로 나중에 파직의 배경이 되었다.
그가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면서, 신분제도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서 천인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나서면서 전세를 바꾸어 놓은 배경이 되었다.
임란은 양반사대부 지배체제가 무너지자 양반들이 계급적 특권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대부들은 그를 공격할 기회만 노렸다.
선조 27년 그는 영의정으로서, 혁명적 세제개혁안으로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과 가난한 농민들이 내는 세금이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을 전면적으로 개혁을 하였다.
그는 세금은 사대부나 농민이 내는 세금부담은 토지면적 단위로 부과하여 균등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임란 와중에서도 최초로 대동법(작미 법, 대공 수미법)을 시행하여 잡다한 공납을 폐하고 쌀로 통일하여 내도록 하였다.
그는 사사롭게 국제무역에 나서다가 발각되면 사형까지 처하는 상업금지 정책을 상업 장려정책으로 전한 시키면서, 압록강에 국제무역시장인 중강개시를 열었으며, 국내 교역도 서로 다른 지역 간의 물품교역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소금을 만들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도록 하는 방안으로 소금 굽는 백성들을 부역을 없게 하며 소금을 곡창지대의 곡물과 교환하도록 하였다.
그는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안목과 해박한 지식으로 행정 관료이고 군사에 통달한 병법과 경제에 밝은 학자이며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실학자이었다.
선조 31년 1598년 1월 19일 북인들의 공세에 유성룡을 파직시키라는 명령을 선조는 내렸다.
전란 극복의 일등공신인 그가 공격을 받아 파직한 이유는 속오 법, 작미 법, 서예 면천, 등용 법 등으로 북인 세력과 양반 사대부들의 불만이었다.
그는 1598년 11월 19일 파직을 당하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양근의 대탄에서 유숙하면서, 용진 하류의 북쪽 언덕인 도미 천에서 하마 해 삼각산을 바라보며 네 번 절을 하고, 시 한 수를 썼다.
정원으로 돌아가는 3천리 길
유악의 깊은 은혜 40년
도미 천 말 멈추고 뒤돌아보니
종납 산 산색은 여전히 의연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