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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우남 이승만의 정치사상

우남이승만

우남 이승만의 정치사상

목차

1. 생애

2. 정치사상

1. 생애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봉천군 성가리에서 3남 2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나, 두 형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갔다.

그는 부모가 2살 때에 서울 남대문 밖 염동에 이사를 해서, 4살 때에 도동 서당에 다녔으며, 13살부터 11차례 과거시험을 응시하였다.

그는 16살 때, 부모가 간택한 박씨와 혼인을 하고, 배재학당에 입학을 하였으며, 21살 때에 서재필의 제자가 조직한 협성회에 참여하였으나, 22살 때에는 배재학당을 졸업을 하였다.

 

그는 23살 때에 협성회보 주필로 활동하다가 제국신문을 창간을 하였으며,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종 9품)에 제수되었으나, 정부가 독립협회를 탄압하자 미국인 의사 헤리셔멘의 집으로 피신을 하였다.

그는 24살 때에 독립협회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면서 탈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종신형의 선고를 받고 한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29살 때에 일본공사 하야시의 도움으로 특사로 출옥했으며, 민영환, 한규설의 밀지를 가지고 미국으로 출국하여 워싱턴의상원의원 딘스모어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30살 때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하면서, 한국 독립 지원을 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실패를 하였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35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37살 때에 105인 사건의 후폭풍을 피해 종교 활동이유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38살에 하와이에 정착하여 월간 “태평양 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44살 때에 3.1운동 이후, 수립된 상하이 노령 임시정부 국무령, 한성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후, 상하이 통합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45살 때에 기차화물칸에 숨어 호놀룰루로 향해 출발하여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46살 때에는 임정의 갈등만 조장하다가 미국으로 떠나가서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였으며, 50살 때에는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이승만 김구 프란체스카

그는 57살 때에 “임정승인” “군사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대한 민주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59살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25살 연하의 프란체스카와 재혼을 하였다.

그는 66살 때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 위원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 외교위원 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70살 때에는 맥아더가 제공한 미군용기 편으로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에 선임되었으며, 71살 때에는 대한독립 촉성 국민회 총재와 미 군정청 민주의원 의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72살 때에 대동 청년단 총재로 취임하였으며, 73살 때에는 5.10총선에서 서울 동대문 갑 구에 출마하여 무투표로 당선되어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74살 때에 국회 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 김구 암살 등의 사건이 있었으나, 민국당에 맞서 대한 청년단을 조직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다.

 

그는 75살 때에 제2대 민의원선거에서 참패를 하였으며,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전면 남침을 하자, 대전으로 피신하면서, 군 지휘권을 미군에 위임하여 부산으로 수도를 이전하였으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함흥까지 수복하는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는 76살 때에 1.4후퇴와 3.8선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있는 가운데 자유당을 창당하여 총재로 취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안하였다.

그는 77살 때에 “평화선” 선포,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의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79살 때에 “사사오입”개헌안을 의결시켜 3선 길을 열었으며, 81살에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82살 때에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을 시켰다.

그는 84살 때에 “여적” 필화사건, 경향신문 강제폐간, 신 보안법을 통과시켰으며, 85살에 사상 초유의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4.19 의거가 촉발되자,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출국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 마우나차이 요양원에서 90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서 국민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스만과 김구

2. 정치사상

우남 이승만의 세계관은 자유민주주의의 시장중심의 자본주의로서, 종교의 자유와 기독교 지향적이었으며, 문명의 개화와 부국강병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과 건국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민족주의였으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20세기 초 한국 사람으로서,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는 가운데서 새롭게 발생된 공동체 의식이라 할 수 있다.

1930년 호놀룰루에서 소집된 동지회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동지회의 권력을 개인의 명예를 위해 남용하지 않고 일생을 청빈하게 살면서, 언행이 일치한 지사(志士)였으며, 현실정치의 무상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정치이념과 지적능력을 발휘한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

1946년 2월 8일 북한은 단독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그는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두려워서 신탁통치를 결사반대를 하였다.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 싹을 강력하게 짓밟아 놓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과의 연립 혹은 합작을 거부하는 일관된 방공. 반탁의 길로 간 것이었다.

그의 반탁운동의 사상으로 친탁을 지지한 남로당을 제외한 비 좌익계 국민을 단결시킴으로서, 해방 후, 좌익 우세였던 정치풍토를 우익 우세로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의 반탁운동 덕분에 한민족은 강대국의 5년 신탁통치를 면하고, 3년 만에 자율적으로 남한만의 유엔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해방 후, 해외에서 귀환한 이승만 등의 자유민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국내에서 성장한 정치단체의 협동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승만가 김구

건국 후,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새로운 나라의 국시로서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정치이념을 제시하였으며, 더 나아가 여당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일민 구락부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민 주의 사상은 신분, 빈부, 남녀, 성별 차별 등을 철폐하여 하나가 되어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자유민주주의가 하나님이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했다는 기독교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군주정치의 압박에 저항하며 미국인들이 일으킨 독립혁명을 모범을 삼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의 사상은 빈자와 부자가 동등한 권리와 복리를 누려야 하며, 자유민주주의에서 여성의 인권을 중시하여 남녀 동등과 지방색 타파를 주장하였다.

 

그의 성품은 혁명가로서 수많은 불목과 충돌을 긴 세월동안 굽히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완고함은 그에 대한 많은 비판자와 정적을 만들어 냈으나, 실패에 직면할 때마다 용기를 내어 자포자기를 하지 않은데 있었다.

이승만과 맥아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