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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루터(Luther)의 종교사상

마르틴 루터

루터(Luther)의 종교 사상

 

목차

1. 생애

2. 종교상

1. 생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독일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1483년 조그마한 정련소를 경영하는 위력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법률학을 이수하였다.

그는 1505년 법률연구의 뜻을 버리고 아우구스티누스 파 수도원에 들어가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부패를 맹렬히 공격하였으며,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 부속 교회의 문에 종교 개혁안 95개 조를 게시하여 로마교회의 불화로 불신을 받았다.

성경공부

이로 인하여 로마 교황, 독일 황제 5세 Karl V의 반감을 사게 되어 신변이 매우 위험하게 되자, 작센 공의 호의로 바르트부르크 Wartburg 성내에 숨어서 지내면서, 그는 여기서 성서 번역과 저술을 하다가 1546년에 사망을 하였다.

그는 학술적 저술을 하지 않고 정치사상 연구에 참고할 수 있는 작품인 “독일 귀족에 고함”, “크리스트 교주의 자유에 관하여” 등을 저술하였다.

기도

2. 종교 사상

종교개혁은 16세기 초, 독일의 신학자 루터가 일으킨 교회 개혁의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종교개혁으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주의에 반대했으며, 신과 인간은 신앙에 의하여 직접 결부되어 성직자의 신분이 필요치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교회에 대한 개혁안을 발표하자 로마교회 측은 루터의 개혁운동을 이단으로 단정하고 운동을 금지시켰으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교회가 자기에게 가한 파문도 무시하고 소신을 주장함으로써, 교회 개혁운동은 교회로부터 분리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러한 종교개혁은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등에 파급되어 광범위한 운동으로 번져나감으로써, 낡은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신교회가 설립되어 두 개의 교회로 분열하였다.

루터 이후의 종교개혁운동은 가톨릭 주의로부터 분리되는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각 국들은 독자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국민주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 경향은 일시적이나마 방해를 받았으며, 종교개혁운동은 교황의 우월을 거부하고, 국민적 애국심으로 뭉치고, 신과 정치 사이의 중세적 연결을 재현시켰다.

종교개혁은 정치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신생국가의 신교 신봉 군주에게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으며, 국가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의 권위와 성직자의 교권정치에 대해 반대를 하였으며,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촉진시키게 하였으며, 인간의 본질적 평등을 강조하면서, 권위의 원칙에 반대하여 양심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루터는 인격 개성의 존중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만의 완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이 이웃사람들에게 이루어져 신의 의사가 지상 세계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적을 삼았다.

그는 그리스 토교의 자유라 함은,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 토교에게 살고 사랑에 의하여 이웃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신앙을 통하여 인간 자기로부터 신에게 접근하게 되고, 사랑을 통하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를 두 가지로 나누면서, 하나는 신의 왕국이요, 다른 하나는 세속적 왕국이라 하면서, 전자는 인간 신앙의 세계를 의미하고, 후자는 속 권에 의하여 통치되는 세계로서 국가를 의미하였으며, 여기서 신앙의 세계는 전적으로 자유의 세계이며, 명령이나 강제가 없는 세계를 말하였다.

그는 군주의 신권에 관하여, 국가 권력은 신에게 우러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절대적이 아니며, 국가권력은 속 권에 위임된 범위 내에서만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루터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