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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백범 김구의 정치사상

백범 김구의 정치사상

목차

1. 생애

2. 정치사상

1. 생애

백범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해주 텃골에서 태어났으나, 천연두를 앓아서 얼굴에 자국이 있었다. 그는 양반이 되기 위해 12살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낙방하자, 18살에 동학에 입문하였으며, 20살에 청계동 안태훈 진사에게 의탁되어 스승 고능선을 만났으며, 27살에 여옥과 약혼을 하였으나 약혼녀는 병사를 하였다.

그는 29살에 안신호와 약혼을 하였으나 파혼을 하고, 광지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황해도 일대를 다니며 신교육사업에 매진을 하였다.

 

31살에 최광옥과 함께 안악 면학회를 조직하고, 최순례와 결혼을 하였으며, 34살에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계몽운동하는 도중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상하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 후에 제령보강학교 교장을 겸임하였다.

36살에 안악 사건의 조작으로 황해도 일대 민족주의자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의 선고를 받고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39살에 5년으로 감형되었으며, 그는 이름을 구로, 호를 백범으로 했으며,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어 인천항 건설공사에 동원되었다.

44살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47살에 내무총장, 49살에 노동국 총관을 겸임하였으며, 51살에 임정의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다음 해에 임시정부의 국무령제를 집단지도 체제인 국무 위원제로 개편되면서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8살에 장개석을 면담하고 중국 중앙 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였으며, 60살에 임시정부의 김구 시대가 개막되면서, 한국 국민당을 조직하면서, 임시정부를 항주에서 진강으로 옮겼다.

62살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를 호남선 장사로 피난을 하였으며, 64살에 임시정부를 쓰촨 성 기강으로 옮겼으나 다음 해에 다시 토교로 이사를 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3개의 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으며, 임시정부를 다시 중경으로 옮겼으며, 여기서 광복군 성립 전례식,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66살에 대한민국 건국강령 발표, 임시정부의 일본에 선전 포고하고, 69살에 임정 주석으로 재선 되었으며, 장개석 면담에서 임시정부를 승인 요구를 하였으며, 70살에는 임정은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제1진이 귀국하자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 환영회가 있었으며, 그는 신탁통치 반대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71살에 비상 국민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하였으며,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72살에 반탁 독립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건국 실천 원양 성소를 개설, 미소 공동위원회의에는 불참 성명을 하였으며, 73살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 항 의견서를 발표하였으며,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보냈으며, 그는 북행하여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을 하였다.

그는 통일독립 촉진회를 결성하고, 북한의 단정 수립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백범 김구는 74살에 백범학원과 창암학원을 설립하면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는 발언을 하였으며,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에 맞아 백범 김구는 운명을 하였다.

2. 정치사상

백범 김구는 한 민족이 국가를 세워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이 나라의 철학이 쏠리고 저 민족에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 한 채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 추태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현상은 로크(Locke)의 철학을 믿는 자들은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는 자들은 모스크바를 서울로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으며,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일제강점기의 동경을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고 하였다.

 

그는 독립 사업에 헌신하다가 죽더라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시체를 성벽으로 삼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를 발판을 삼아 민족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 삼아 민족문화의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평생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상은 나라는 내 나라요 남의 나라가 아니며,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이 안 될 수 없고 좋은 나라 큰 나라로 길이 보전된다고 하였다.

그의 평생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며,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다가 죽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그는 민족의 최고 임무는 남의 간섭도 받지 아니하고, 남에게 의지 도하지 않은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주독립 없이 민족의 생활보장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이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 없다고 하였으며, 지구 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며, 인류의 세계는 생활의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며, 이것은 우리 민족이 담당할 천직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치이념은 자유로서, 이러한 자유는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자유라면, 레닌의 말대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임시정부

그는 우리나라는 독재의 나라가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며, 독재의 나라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을 제외하고, 국민들을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했으며, 독재 중에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로서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라고 하였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조선에서의 행해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중에서 주자 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 규정하는 독재라고 하였다.

이러한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참다운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되었으며,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여 예술, 경제, 산업에 영향이 미치게 하면서, 나라가 망하고 국민이 힘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으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빠른 진보를 보이는 것 같지만, 끝내 병통이 생겨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한다고 하였다.

 

그는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기 위한 절차 또는 방식이지, 그 내용이 아니며,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의 복종이 민주주의라고 하였으며, 이를 통한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이나 정책을 만들 수 있으므로 이를 제한하는 것은 오직 헌법의 조문뿐이라고 하였으며, 헌법 또한 독재주의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 있는 나라의 백성인 주권자라고 하였다.

그는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되며,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개인을 포함한 국가에서도 해가 된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우리나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