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목차
1. 생애
2. 실학사상
1. 생애
다산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그는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남인에 속하면서, 명망 높은 관료 학자였으며, 모친은 실학자이며, 화가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그는 14살 때에 부친이 호조좌랑으로 전임되자 서울로 이사를 와서, 25살 때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다.
그는 34살 때에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농촌의 궁핍상과 행정의 부패상에 통분하여 경제개혁을 구상하게 되었으며, 그는 병조참의, 좌부승지, 부산 부사로 전임되었으나, 노련 벽파에 밀려 유배를 간적이 있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조가 급사를 하자 노련벽파에 의해 탄압과 박해를 받게 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다산은 유배생활 18년 동안 불교와 관계를 가지면서, 저술에 전념을 하면서, 학술사상을 집대성하는 대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정치, 경제에 대한 개혁 구상을 밝힌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제 유표 등이 있으며, 이외 500백여 권이 넘는 서적이 있었다.
그는 1818년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75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들을 교육에 몰두하였으며, 여행과 미술에도 취미를 가졌었다.
2. 실학사상
다산 정약용의 사회 개혁사상의 골격이 되는 것 중에서 경제 유표로서, 이는 중앙행정에 관한 개혁 구상이며, 국가의 기본적인 재건 방향을 추구한 요체이었다.
이 책은 강진 유배시절에 저술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끝맺었지만, 저술의 동기는 사회는 무엇 하나 병들지 않는 것이 없어, 지금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친 후에 고치게 될 것이므로 충신과 열사가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세유표는 처음부터 천관 이조(天官吏曹)에서 주례(周禮)의 이념과 제도를 조선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려는 근본 구상을 펼쳤다.
즉, 궁극적 지표는 부국강병에 두고 중앙의 인사 행정기구를 개혁하는 데 있었다.
지관 호조(地官戶曹)에서 주례의 이념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즉, 국가의 가장 시급한 것은 전정(田政)으로써, 재정개혁의 문제를 토지제도의 문제와 직결시켜서 기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동관 공조(冬官工曹)에서 주례 체제를 기준으로 상공업의 발전 문제를 기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여기서 개혁 문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다루면서, 부국강병론과 이용 수행론이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금은의 국외 유출을 통탄하였으며, 차나 인삼을 재배 수출과 기계나 말 같은 생산적인 것을 수입을 강조하고, 국내의 통화개혁을 위해 전환서 설치를 주장하였다.
아울러 북학사상을 강조하고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용 감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는 봉건제의 물질적 기초인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농촌경제를 재편성하고 농업을 공동농장으로 재생산하여, 분배는 원칙적으로 노력에 따라 분배해 나가 한다는 개혁론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지주제를 타도하고 나아가 정치권력을 재편하는 문제까지 접근하였으나, 이는 지금 현실적으로는 실현성이 없는 급진적이고 환상적인 구상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결국, 중세 봉건사회를 극복하려는 다산 정약용의 정치와 경제사상은 중앙인사행정 기구에서부터 재정문제, 상공 문제, 토지 개혁론까지 광범위한 것은 경제적으로 전호제, 사회적으로 노 비제, 정치적으로 중세적 벌열제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혁신적인 개혁론의 이념적 기반은 경학론에 있는 것으로서 볼 때, 정치경제론과 경학론의 종합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