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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안중근의사 정치사상

안중근의사

안중근의사 정치사상

목차

1. 생애

2. 정치사상

1. 생애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백천 조 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 설치한 사당에서 사서삼경 등을 읽고, 시간의 여가 생기면, 포수를 따라다니면서 사격술을 익혔다. 1894년 16살에 한 살 연상인 김아려와 결혼을 하였으며, 그는 아버지를 도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선봉장으로 나섰다.

 

1896년 18살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청계동에서 전교활동을전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후, 19살에 홍석구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서 세례명이 토마스였으며, 20살에는 홍석구 신부를 따라 황해도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전교 활동을 하였다.

1906년 28살에 서양식 건물에 삼흥학교를 설립했으며, 천주교 계통의 동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을 하였으며, 특과 독립 대장 겸 아령 지구 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 동의 일본군과 경흥의 일본군 경찰대를 격파하였다. 

사형집행

1909년 31살에 크라스키노에서 동지 11명이 단자동맹을 결행하여 동의 단지회를 결성하고, 왼손 무명지를 절단하여 피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쓴 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그는 오전 9시 30분경에 하얼빈 역에서 총 세발로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키고, 일본 수행관리를 부상시킨 후, “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가 여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치명상을 입고 열차 안에서 20분 후에 절명하였으며, 일본정부는 관동도독부 법원에 안중근을 사형 지령을 내렸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며, 감옥에서 “안응칠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3월 26일 고향에서 보내온 조선 옷을 갈아입고 10분 동안 기도한 뒤 형장으로 나가 유언으로 “나의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관리들도 앞으로 한국과 일본이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2. 정치사상

젊은 시절의 안중근은 장부가 한 번 태어나서 큰 뜻을 가지게 되면, 시대가 영웅을 알아주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는 생각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서양 문물을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날로 어지러워서 탐관오리뿐이니, 장래가 예측할 수 없어, 올바른 선비로서 벼슬을 하여 공명을 떨 칠 수 없다고 하며, 깊은 산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므로 이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피와 땀으로 투쟁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때문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나라의 사직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움을 구해야겠다는 강한 결심을 하였다.

그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필요한 것은, 구국 영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애국지사들을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고, 민중이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준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憤死)하고,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되자,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

더욱이 일본이 조국을 침략하여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여 명성황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르자 그의 분노가 거대한 산맥처럼 가슴을 짓눌러 와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일본 침략을 격퇴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는 11명과 단지동맹을 맺어서, 무명지를 자르면서, 나약한 마음을 다그치고, 의병활동으로 죽은 동지를 위로하면서,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투쟁을 하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죽이러 가는 자와 죽음을 마지로 오는 자가 모두 같은 열차를 타고 하얼빈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두고 죽음의 길로 가는 그의 심정은 기적소리에 묻히고, 그의 생각은 오직 나라를 위한 무한한 영광만 있었다.

그의 정치적 행동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쏜 세발의 총성은 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을 쏜 것이 아니라 조선과 민주를 침략한 일본의 심장을 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