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Nietzsche)의 철학사상
목차
1. 생애
2. 철학사상
1. 생애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목사 카를루트비히니체 아버지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 사이 3자녀의 첫째로 독일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경구절이나 찬송가 가사를 이용해서 친구들에게 감동을 주어 “꼬마 목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1858년 여름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여 이후, 10년 동안 8편이 자서전을 썼으며, 10월에 엘리트 기숙사 학교인 슐 포르타에 입학을 하였다.
1861년 그는 글을 쓰기 시작하여 학습동아리 “게르마니아”를 결성하여, 1년 후. 최소한 6편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1864년 그는 졸업논문으로 “메가라의 테오그니스에 대하여”를 썼으며, 처음으로 고전문헌학 논문으로 선생님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865년 그는 문헌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하고, 체험예술 감상에 관심을 두면서부터 “괴짜”로 통했으며, 쇼펜하우어에 자극을 받아서 나 자신을 알아야겠다는 욕구, 나 자신을 분석해야겠다는 욕구가 강력하게 사로잡혔다.
1867년 그는 데모크리토스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1868년 나움 부르크에서 1년 동안 포병으로 군복무를 하였다.
1868년 그는 박사학위도 없고, 교수자격도 없지만, 리츨 교수의 주선으로 스위스 바젤대학의 초빙교수가 되었다.
1872년 그는 “비극의 탄생”을 출간하였으며, 문헌학 학자들의 혹평과 리츨 교수는 재치는 있지만, 제멋대로라고 평을 하였다.
그는 또다시 “반시대적 고찰”의 제3권을 쓰기시작 하였으며, 1877년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필을 계속하여, 1878년 4월에 출간을 하였으나, 친구들로부터 비판과 거부를 당하였다.
1879년 그는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을 출간하면서, 바켈 대학에 사직을 하였으며, 1881년 여름 “아침놀”을 출간하여 나중에 “즐거운 학문”으로 제목을 바꾸었으며, 8월 초에 영원회귀 사상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여 영감을 체험하였다.
1883년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와 2부와 3부를 쓰면서, 8월에 제1부를 출간하였다.
1884년 제2부를 출간하면서, 획기적인 작품이 될 것을 확신을 가지면서 4월에 3부를 출간하면서, 다시 4부를 집필을 하였다.
1885년 그는 제4부를 완성하고 친구와 지인들을 위한 개인 소장본으로 인쇄를 하였으며, 186년 그는 “선악의 저편”을 집필했으나 출판사를 찾지를 못했으며, 1887년 그는 “즐거운 학문”을 제5원을 집필하고 “힘에의 의지”를 작업 준비를 하였다.
1900년 8월 25일 중병으로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가지 당당함을 읽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였다.
2. 철학 사상
니체의 젊은 시절에는 고전문헌 학자로서, 고대의 위대한 철학적 행위에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쇼펜하우어의 체험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그는 언제나 문헌학자로 머무는 것을 불만을 품었으며, 자신이 언제나 저술가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전공과 달리 글쓰기와 철학공부에 열정을 받쳤으며, 자유 분망 한 사유 태도로 자기 사유의 독보적 언어를 구조해 내려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통찰과 독특한 표현의 유착관계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자기 형성의 과정에 사상도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표는 문화의 유성이며, 특히, 그는 국가, 종교, 문화를 거대한 현실 권력을 동시에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중에서 문화를 가장 주요시하면서, 모든 일은 문화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최상의 목표이며, 문화가 국가나 경제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문화에 대한 정의로서, 문화의 진정한 의미는 최대 다수의 행복에 있는지, 아니면 개인적 삶의 성공에 있는지 선택하여야 하며, 최대 다수의 행복은 도덕적인 관점인 반면, 최고치에 도달한 성공한 개인의 문화의 의미는 심미적인 관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 인간의 존엄, 자유, 균형 잡힌 정의, 약자의 보호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위대한 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방해한다고 하였다.
즉, 빛나는 형상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와 더불어 신의 죽음 이후 아직 남아 있던 의미로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신화를 압축된 세계상이라고 묘사하면서, 이를 통해서 삶은 한 층 더 높은 의미를 가지지만, 신화는 개인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연관성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는 종교를 믿을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합리적 이성이 삶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화로 눈을 돌리는 것은, 신화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것에 형상력에 강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학문이 아니라 지혜였으나, 독일제국의 수립이 그의 모든 비관주의 철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는 역사주의가 지식과 인식으로 인한 생명력 마비현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 하였으며, 우리들의 삶의 향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상, 열정, 사랑에서 나오는 삶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영감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였으며, 영감이 우리에게 고상하게 다가오는 많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보다 더 근사하게 보이는 것이며, 우리의 허영심은 천재와 영감의 숭배를 촉진한다고 하였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힘에의 의지의 원칙은 자기 극복의 원칙이 중심이며, 힘에의 의지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힘에의 의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은 자신이 처한 암울한 상황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1의 천성과 싸우면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원하는 혈통을 지어낸다고 하였으며,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제2의 천성을 만들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선언은, 19세기 후반에서 종교는 일반적으로 한물 간 상태였으며, 자연과학이 약진하고 있는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신은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또한, 사회와 역사 그리고 개인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된,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은 사회나 역사를 자체적으로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여김으로써, 어떠한 신에 관한 가설도 필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