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경제성장과 쇠퇴
1. 그리스의 화폐경제 도입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인 로마가 성장할 무렵에 그리스는 국토면적이 좁아서 대규모의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상업 교역을 중시하게 되었으나, 로마는 농업을 중점을 둔 국가이었다.
로마제국은 인접국가의를 점령하여 토지를 빼앗아 지배영역을 넓혔으며, 무엇보다도 로마제국의 성장과정은 화폐경제를 도입하면서, 그리스인의 식민지인 이탈리아 남부의 네아 폴리스를 점령하여 편입한 후에 화폐경제를 사용하였다.
초기의 로마의 화폐는 로마의 건국 신화와 말이 끌고 가는 전동차 등 로마의 확장과 건국, 전쟁에 관한 장면을 그림 화폐를 사용하여 국가의 이념을 공유하고 나라를 통합하는 광고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세 차례를 치른 포에니 전쟁을 하였으며, 로마가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시칠리아를 확보함으로써, 밀과 오렌지, 올리브와 포도, 곡물 등을 생산하여 로마의 곡창지로서 제국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로마제국은 포에니 전쟁에서 2차와 3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하여 승리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여 화폐경제를 도입하여 국가로서 성장하였다.
2. 로마제국의 성장
로마제국은 시칠리아, 이집트, 갈리아 등 농업생산력이 높은 지역을 점령하고 황폐한 농경지를 관리하여 경작지에서 수확한 저렴한 농산물을 대량으로 로마에 공급을 하였다.
로마제국은 전쟁을 할 적마다 승리를 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전쟁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을 이용하여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저렴한 비용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제국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로마제국은 실업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지 않도록 식량과 오락거리를 공급하는 이른바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주민의 반란을 방지하는데 이용하였다.
로마제국은 중소농민들이 전재에 나가거나 도시로 가버려서 징발 병사가 감소하게 되자,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거나 내부에서 기간산업의 공동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마는 공화정에서 한 명의 황제가 통치할 경우에는 로마의 화폐는 수만 종류의 도안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카이사르는 자신의 초상에 화폐에 새기게 하였다.
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사람의 이름과 초상을 화폐에 각인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카이사르가 일단 위반을 하자, 그 이후의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거리낌 없이 인쇄를 하였다.
3. 로마제국의 쇠퇴
로마제국은 확장세가 주춤하기 시작한 것은, 군인황제 시대와 전제군주제 시대가 도래하게 되자, 국정을 유지하기도 힘들게 되자 로마제국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은 전쟁이 없어 영토를 확장하지 않게 되자 노예를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더욱이 노예들이 도망을 하거나 사망을 하게 되자 노예제의 대농장 “라티푼디움”을 유지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부유층은 몰락한 농민 출신인 도시의 하층 시민과 노예를 소작인으로 부리게 되자, 노예들의 처우를 개선하면서 가정과 아이를 낳게 되게 되면서, 자유로워졌으나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반노 예가 되면서, 이러한 반노예 상태의 소작인은 훗날 중세 사회에서 농노의 전신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세력 확장이 멈추자 화폐경제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화를 주조하면서, 자연히 은이 고갈되었다.
로마제국은 엄청난 국가의 유지비와 군사비가 들게 되자 은화의 크기를 줄이거나 은의 함량을 낮춰서 은화의 숫자를 늘리게 되었다.
로마의 은화는 순은의 함량이 점점 줄어들어 금속으로서의 동전의 가치는 떨어지고 금속으로서의 은의 가치 자체가 화폐의 가치로 이어졌다.
질이 낮은 동전으로 오랫동안 발행하자 은화의 신용이 떨어지자 같은 물건을 과거보다 많은 동전을 내고 사는 물가상승을 가져오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로마의 경제는 혼란에 빠지면서 로마가 쇠퇴한 요인들의 하나로 작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