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참(圖讖)도참(圖讖) 사상에 관하여!
개념
도참은 도와 참을 합친 것으로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관한 길흉화복을 알고자 하는 염원에서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일부에서 나온 사상이다.
도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상징, 표징, 신호, 징후, 전조, 암시를 뜻하며, 일정한 문자나 기호 또는 구체적 대상물이 미래의 어떤 일과 깊은 연관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참은 참언, 참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은어와 밀어의 상징적 언어로 미래에 일어날 사상을 예언하는 것이다.
결국, 도참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예언으로서 천문, 지리, 음양오행, 주술로서, 도교와 불교까지 원용되고 있다.
2. 도참사상의 전래
1) 고려시대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토지제도의 문란, 정치의 문란으로 후백제 견훤, 후고구려 궁예 등 군웅이 봉기했었다.
그 후 왕건이 고려 건국에 관련된 도참은 이른바 고경참으로서 이 도참은 왕실 운수가 12대 360년으로 되어 있었다.
구려 태조는 도참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어, 도참설에 의거 천조를 결의하거나 후손들에게 경계하는 “훈요십조”를 지었다.
2) 조선시대
조선의 문물이 새로 정비되고 유교식 개편이 완성된 이후, 사화와 임진, 병자 양난과 왕조의 변혁기에 국내정세가 혼란 하자 다시 도참사상이 성행했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송도는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라고 도참설 의해 천도를 계획했다.
그러나 태종은 도읍지를 창덕궁으로 옮길 때 척전으로 점을 치기도 했지만, 태종 자신은 도참을 비합리적 미신이라고 생각했다.
태종 때 도참서가 된서리를 맞았으며, 유학의 합리주의 사상이 지배하자 도참은 표면적으로 잠잠해졌다.
그러나 신진 사림파가 기성 관료와의 대립으로 인한 사화 때는 도참사상이 한몫을 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정감록”이라는 도참서가 널리 퍼졌으며, “정감참위”의 설이 서북지방에 유행했다.
3. 결론
도참설은 형식적 특성의 예언이지만, 인과율의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원인과 결과에서 아무런 합리적인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과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난다고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지만, 도참설은 여러 조건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일반적이고 과학적 예측과는 구분된다.
특히, 도참설은 정치적 음모와 결부되어 집권층의 체제를 유지 시키기 위해 봉사하거나 반체제 세력의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이용되었다.